첫 방송부터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지원이라는 논란을 낳았던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는 결국 다음주 방송을 결방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사진=SBS 제공
지난 3월 24일 방송사인 SBS와 제작사인 YG스튜디오플렉스, 크레이브웍스, 롯데컬처웍스 측은 공식입장을 내고 ‘조선구마사’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3월 29~30일 예정된 차회 방송을 결방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주연 배우들의 논란으로 일정기간 동안 방송이나 촬영이 중단된 사례는 앞서 ‘달이 뜨는 강’이나 ‘날아라 개천용’ 등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아예 드라마 자체의 문제로 중단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수정된 작품도 보고 싶지 않으니 방영 자체를 아예 중지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미 극중 등장인물인 태종 이방원, 충녕대군, 양녕대군에 대한 왜곡된 설정을 문제로 전주 이씨 종친회(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도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방영 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종친회는 24일 성명문을 내고 “대다수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조선왕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잘못된 역사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우려로 해당 방송국과 제작진에게 강력한 대응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전면 수정이 아닌 방영 중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분노는 방송사와 제작사를 넘어 작품을 홍보해 온 배우들에게까지 향했다. 감우성(이방원 역), 장동윤(충녕대군 역), 박성훈(양녕대군 역), 김동준(벼리 역), 정혜성(도무녀 무화 역) 등의 개인 또는 공식 SNS에 출연 결정을 비판하며 하차를 요구하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일부 소속사가 직접 댓글을 제한하거나 비판 댓글만을 골라 삭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대중들의 더 큰 반감을 사기도 했다.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태종 이방원과 세종, 양녕대군에 대한 역사를 왜곡했다며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사진=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제공
‘조선구마사’의 극본을 맡은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 배우들에게도 같은 분노가 이어졌다. 먼저 여주인공 김소용 역을 맡았던 신혜선이 최근 모델로 발탁된 한 마스크 브랜드의 공식 홈페이지에 항의글이 쇄도했다. 이어 ‘철인왕후’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나 작품 종영 후 긍정적인 입장을 내놨던 김정현이나 나인우 등 다른 주조연 배우들에게도 비판이 쏟아졌다.
대중들의 분노가 ‘조선구마사’를 넘어 ‘철인왕후’에까지 쏟아진 데에는 “제대로 잡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선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주된 이유가 된 것으로 파악된다. ‘철인왕후’의 경우 중국 작가의 작품을 리메이크하면서 작가의 혐한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 ‘코믹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를 내세워 희화화하고 왜곡한 점이 비판에 더욱 불을 붙였다. 이에 풍양 조씨 종친회 등이 항의를 하고 나서야 인물 소개를 슬쩍 바꾸는 방식으로 무마했던 게 ‘철인왕후’의 사례였다.
‘철인왕후’ 제작사 역시 YG스튜디오플렉스와 크레이브웍스로 ‘조선구마사’와 작가와 제작사가 모두 동일하다. “논란이 불거지면 대충 수정으로 넘어가면 된다”는 교훈(?)을 얻은 이들이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무마하려 들 수 있다는 점을 대중들이 먼저 지적한 셈이다.
‘조선구마사’ 방영 중지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은 25일 오후 기준 16만 여 명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캡처
그러나 출연 배우들에게까지 비난과 항의가 쏟아지는 것을 두고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배우가 대체 무슨 힘이 있냐”는 반론도 나온다. 현 상황에서 대중들의 바람대로 배우가 중도 하차를 요구하기 어렵고 애초에 계약상 그럴 수도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한 연예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출연 계약을 체결할 때 그 기간 동안 배우나 소속사, 홍보 대행사도 방송사와는 별도로 작품 홍보를 해줄 것을 계약 내용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배경이 있는만큼 단순히 ‘왜 홍보하냐’고만 비난한다면 배우나 소속사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작품 자체의 논란이 불거진다고 해도 배우가 직접 촬영 중단이나 중도 하차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앞선 관계자는 “배우가 무조건적인 갑도 아니고 특히 ‘조선구마사’ 같은 경우는 감우성 정도의 배우가 아니라면 대다수가 제작사에 자기 목소리를 높일 정도의 급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런 상황에서 ‘왜 자진 하차 안 하냐’는 비판이 나온다면 소속사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반면 대중들의 이 같은 반응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단순한 ‘냄비 근성’으로 폄하될 문제가 아니라 ‘이전까지 쌓인 분노가 집단적으로 폭발하면서 이후에도 폭발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이다. 배우들에 대한 항의도 실제로 하차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보다는 문제작을 바라보는 사회적 여론이 이 정도의 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는 것. 결국 SBS나 제작사가 인정한 것처럼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문제가 발생했으니, 대중들의 예민함만을 탓할 게 아니라 모든 관계자들이 이에 따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드라마 제작업계 관계자는 “일제시대를 다루는 드라마 ‘각시탈’은 일본 진출을 눈치 본다고 몇 명의 배우들이 출연을 고사했고,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일부 작품도 정부나 주요 단체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작과 캐스팅 난항을 겪은 사례를 대중들이 더 잘 알지 않나”라며 “그런 이유로 외면해 왔으면서 실제로 우리 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사 왜곡 논란 작품들엔 시청률과 해외 인기가 보장된다는 이유로 출연을 결정하는 연예인들에게 대중들이 환멸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고 꼬집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