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던 두 팀이 다시 만나 올해도 작년과 판박이처럼 비슷한 흐름이었지만 결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물가정보는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2차전을 따내며 끈질기게 추격전을 펼쳤지만, 마지막 뒷심이 부족했다. 지난해 최종국에서 신진서를 꺾고 자신의 손으로 팀 우승을 결정지었던 신민준은 다크호스 강승민에게 덜미를 잡히며 상대에게 승리에 필요한 3승째를 헌납하고 말았다.
2년 연속 전쟁과도 같은 혈전을 치른 두 팀의 챔피언결정전을 돌아봤다.
2020-2021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서 정규시즌 1위에 이어 통합 우승을 이룬 셀트리온. 지난해 준우승의 아쉬움을 떨쳐내고 창단 2년 만에 정상 등극에 성공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웃지 못한 신민준
“차라리 일반대회 우승을 목전에서 놓쳤으면 놓쳤지, 바둑리그에서 나 때문에 팀이 패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 바둑리그를 뛰는 프로기사라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흡사 축구 경기에서 자신의 자책골로 팀의 패배가 결정되는 느낌과 같다는 것.
그렇게 부담이 많은 승부, 바둑리그에서 물가정보의 주장 신민준은 2년 연속으로 웃지는 못했다. 팀이 0-2로 끌려가고는 있었으나 신민준이 3국만 잡아준다면 물가정보에게도 기회는 있었던 상황. 실제 하루 전 열린 2차전에서 물가정보는 2연패 후 3연승으로 2차전을 잡은 바 있었다.
뒤에는 챔피언결정전 들어 실질적인 주장 노릇을 하고 있는 강동윤이 버티고 있어 신진서, 원성진의 원투펀치를 전부 소진한 셀트리온보다 물가정보에 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랭킹 4위 신민준이 랭킹 24위 강승민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물가정보의 2연패 꿈은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신민준은 지난해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팀이 2-0으로 앞서고 있던 세 번째 경기에서 신진서를 만났다. 당시 신진서의 기세가 워낙 무서울 때라 대부분 신진서의 승리를 점쳤지만(실제 신민준은 당시 신진서에게 연패를 당하고 있었고 상대전적은 5승 18패로 일방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신민준은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앞서나가며 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반면 정규리그 16전 16승, 포스트시즌 6연승을 달려온 신진서는 마지막 가장 중요한 대국을 패하면서 22승 1패를 거두고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21년 비운의 주인공은 신민준이 되고 말았다.
#원성진, 새 역사를 쓰다
셀트리온의 2지명자 원성진은 마지막 대국도 승리로 장식하며 올해 바둑리그에서 17전 전승(정규 14승, 포스트시즌 3승)이란 대기록을 작성했다.
역대 바둑리그에서 한 시즌 전체를 전승으로 마친 예는 2005년 박영훈의 9승(정규 7승·포스트시즌 2승) 이후 두 번째다. 하지만 올해 원성진은 갑절에 가까운 승리를 기록했고 당시 박영훈이 20세였던데 반해 36세의 노장이면서도 17승을 올려 더 값진 기록으로 평가된다.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은 두 팀. 지난해에는 한국물가정보가 웃었고, 올해는 셀트리온이 웃었다. 최종 3차전의 3-0은 2년 연속 같은 스코어. 사진=한국기원 제공
팀을 우승으로 이끈 원성진은 “정말 벅차다. 평생 기억에 남을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원성진은 올해 바둑리그에서 대국료로만 5920만 원의 수입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이는 명인전, 맥심커피배의 우승상금 5000만 원보다 많은 금액. 원성진은 승자 대국료 360만 원이 주어지는 장고대국에서 12승을 거둬 4320만 원의 수입을 올렸고, 320만 원의 승자 대국료가 걸린 속기대국에서도 5승을 올려 1600만 원을 추가로 확보했다. 바둑리그의 우승상금이 2억 원이어서 5명의 멤버가 n분의 1로만 나눠도 4000만 원의 상금을 추가할 수 있어 바둑리그에서만 1억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최초의 기사가 됐다.
#강동윤의 늦은 출장
포스트시즌에 들어서면 팀마다 ‘미쳐줬으면 하는 선수’ 혹은 ‘꼭 해줘야 할 선수’가 있기 마련. 올해 물가정보를 두고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강동윤을 그런 선수로 지목했다.
강동윤은 정규리그에서 6승 8패로 부진했으나 포스트시즌 들어서는 한종진 감독의 믿음대로 귀신같이 되살아났다. 한 감독은 포스코케미칼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 제1국에 강동윤을 출전시켜 가장 까다로운 상대 이창석을 잡아냈다. 강동윤은 2차전에서도 상대 2지명 최철한을 꺾고 팀 승리에 주춧돌을 놓았다.
강적 셀트리온을 상대로 물가정보는 후반 싸움에 대비해 강동윤을 아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셀트리온의 쌍포가 워낙 막강하니 1~3국에서 최소 1승을 거둔 후 4국과 5국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 한 감독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1차전은 실패. 신민준이 신진서를 잡아줬지만 4국에 출전한 허영호가 패하면서 마지막에 대기하고 있던 강동윤에게 연결시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2차전에서는 작전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예상대로 신진서, 원성진에겐 승점을 허용했지만 장고대국의 허영호가 승리하며 바통을 강동윤에게 넘길 수 있었고, 물가정보는 당초 계획대로 강동윤, 박하민의 연승으로 승부를 최종 3차전까지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물가정보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0-2로 끌려가면서도 장고대국에 나선 1지명 신민준이 4국으로 이어주기를 기대했지만, 이번 시즌 챔피언결정전의 사나이 떠오른 강승민이 신민준을 잡아내면서 물가정보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동윤을 앞에 내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승부란 원래 그런 것이다.
[장면도] 신민준의 독수 KB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3차전 제1국 ● 강승민 ○ 신민준 2021년 3월 28일 141수끝, 흑 불계승 장면도 팽팽하던 국면에서 하변에서 돌연 사고가 발생, 하변 백 전체가 흑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집으로 따라잡기 어려워진 백은 상변 흑을 공격해 전체를 잡아야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상변 흑에 대한 공격의 출발점이 궁금한 장면에서 신민준의 선택은 백1의 독수(毒手)였다. 그러나 흑2·4의 응수타진이 좋은 수순. A와 B가 선수로 듣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흑6. 신민준의 괴로운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