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관련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1심 재판 판결문을 본 판사들의 반응이다. 대법원이 최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는 엄격하게 범위를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고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해 유죄로 판단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유죄 선고를 위해 억지로 직권남용을 가져다가 붙인 느낌’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3월 23일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관련,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1심 재판 판결문을 본 판사들은 “직권남용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진=일요신문DB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3월 23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법관들에게 첫 유죄 선고를 내렸다. 이미 1심 재판에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모든 판사들이 무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법조계는 재판부가 내놓은 판결문에 집중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를 확장한 ‘새로운 해석론’을 냈기 때문이다.
형법 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무원의 ‘직권’과 ‘남용’을 따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직권은 ‘공무원의 일반적인 직무 범위에 속하는 업무인가’를, 남용은 ‘이를 넘어서서 부당하게 실질적, 구체적인 지시 및 행위를 했는가’이다. 대법원이 제시한 판례 기준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로 회부된 사건에서 ‘엄격하게 보고 유죄를 적용하라’는 취지의 판단을 이미 내렸다. 2020년 1월 박근혜 정부 시절에 문화·예술계 특정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정무수석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를 좁게 인정하라며 ‘무죄 취지’로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특정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정무수석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를 좁게 인정하라며 ‘무죄 취지’로 판단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의무가 없는 일’을 한 것에 해당하는지 엄격하게 봐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블랙리스트)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 상황 보고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법령 등의 위반 여부를 심리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앞선 1심과 2심의 심리 미진을 지적했다.
2020년 1월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으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안태근 전 검사장 역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해석 덕분이었다. 당시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안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안 전 검사장은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2015년 인사실무자인 신 아무개 검사에게 수원지검 여주지청에 근무하던 서 검사를 창원지검 통영지청으로 보내는 인사안을 작성하도록 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2010년 서 검사를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 직권을 남용해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직권, 즉 인사 권한을 넓게 봤다. 안 전 검사장이나 실무자인 신 검사 등에게도 인사안을 작성할 ‘재량’이 있다고 판단했다. 인사 재량을 가진 신 검사가 여러 인사기준 중 하나인 경력검사 부치지청 배치제도를 따를 의무가 없기 때문에, 통영지청으로 서 검사를 배치한 게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자연스레 해당 직무 권한이 있는지 여부부터 따지는 게 당연해졌다. 권한이 있는지, 있다면 권한을 넘어섰는지로 따지는 것이다.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 개입 의혹으로 기소된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가 무죄를 선고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1심 재판부는 “법관의 독립 원칙에 따라 사법 행정권자(임성근)에게는 재판 업무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고 봤다. 재판에 관여하는 지시를 했지만, 권한이 없기 때문에 처벌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민걸(사진), 이규진 전 판사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는 이들이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의 재판 사무 핵심 영역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판단했다. 사진=임준선 기자
재판부는 “법원조직법과 예규 등을 살펴봐도 행정처가 담당판사에게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는 명문 규정은 없다”면서도 “판사가 나태하거나 숙련이 안 돼 장기미제사건 처리를 지연한 경우 대법원장이 판사 상대로 어떤 지적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설명했다.
권한이 있다고 본 근거를 ‘지적할 권한’에서 찾은 것인데, 직권의 폭을 대법원 판례와 다르게 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대법원이 기준으로 내세운 일반적인 권한 내에서의 남용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직권의 월권적 남용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고 재판부는 봤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대한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재판부에 ‘권고’할 경우 권한을 벗어나 직권남용이 성립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 같은 개념 판단을 토대로 △통합진보당 소송에 개입한 점(이민걸·이규진)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법원 내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시키려 한 점(이민걸·이규진)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을 통해 헌재 사건 정보를 수집한 점(이규진) 등이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반발을 우려했는지 “일반적 직권에 속하는 사항에 관련됐다는 ‘관하여’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대법원 판례의 여러 사안을 보면 직권남용죄가 인정된 사안이 모두 일반적 직권의 ‘정당한 범위 내에서’ 행해진 사안인 것은 아니고 일반적 직권에 속하는 사항과 ‘관련하여’ 행해진 사안도 여럿 있기 때문”이라고 첨언했다.
새로운 직권남용 해석에 대해, 법원 내에서조차 의심어린 시선들이 제기된다. 직권남용을 좁게 봐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까지 나온 상황에서, 민법의 영역인 ‘월권적 남용’을 형사재판에 가져와 적용한 것은 죄형법정주의(어떤 행위가 범죄로 성립되는지, 그 범죄에 대하여 어떤 형벌을 줄 것인지는 법률에 의해서만 정할 수 있다는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법원 관계자는 “직권과 남용의 영역에서, 이번 재판부는 직권을 ‘관련이 있다’면 적용 가능하다고 보고 범죄 혐의 전체에 대해 ‘남용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이번 사건은 법원행정처 내 직무로 명시되지 않은 영역의 행위까지 ‘직권이었다’고 본 부분에서 유죄로 처벌하기 위한 재판부의 넓은 해석이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앞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판결문을 보면서, 대법원이 내놓았던 직권남용의 처벌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비교하고 얘기하느라 말이 많다”며 조심스레 “2심 재판부에서 일부 혐의는 무죄로 바뀌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