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신화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포스트 재보선 정국의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한때 서울시장 출마설이 나돌았던 김 전 부총리가 연일 새판 짜기를 고리로 보폭을 넓히자, 여야의 대선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 김 전 부총리를 뺏기는 쪽은 여권이든 야권이든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전격 등판으로 주목받는 제3지대에 둥지를 틀 경우엔 대선발 정계개편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사진=박은숙 기자
“활용 가치가 많다.”
여야 관계자들이 꼽은 김동연 카드의 강점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든 김 전 부총리의 매력은 △경제 전문가 △충청 대망론 가능성 △중도 외연 확장력 △고졸 신화 등 삶의 스토리다. 김 전 총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통이다. 1982년 행정고시(제26회)와 입법고시(제6회) 합격 후 경제기획원과 재정경제원, 기획예산처, 국무조정실 실장 등을 거치면서 약 40년간 정통 관료의 길을 걸었다. 이 중 절반가량은 국정운영 밑그림을 그리는 데 일조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중장기 경제정책인 ‘비전 2030’ 구상에 참여했던 김 전 부총리는 이명박(MB) 정부 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을 맡았다. 이후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에선 초대 국무조정실장을 맡았다. 9년여 만에 정권을 탈환한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초대 경제사령탑에 발탁했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역할이 필요하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 셈이다. 국회 한 보좌관은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를 안다는 것은 큰 강점”이라고 밝혔다. 특히 경제 실정론이 문재인 정부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 전 총리의 역할론은 한층 커질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부총리가 무주공산인 충청권(충북 음성) 인사라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충청은 역대 대선 때마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지역이다. 1997년 대선 당시 호남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충청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만든 ‘DJP 연합’과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표 재미를 봤다고 밝힌 ‘행정수도 이전’ 공약 등도 지역 표심을 공략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차기 대선에서도 충청권 표심은 핵심 변수로 격상할 전망이다. 정진석 의원 등 국민의힘 충청권 인사들은 윤석열 전 총장 퇴임 전부터 야권발 정계개편에 불을 지폈다. 이번에야말로 ‘충청권 핫바지론’을 극복할 절호의 기회라는 결기도 엿보인다. 부친이 충남 공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서울 출신인 윤 전 총장은 충청권 인사로 분류된다. 그만큼 충청의 한이 깊다는 얘기다.
관전 포인트는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충청 대망론이 트리거 역할을 할 수 있느냐다. 외곽 지대에 있는 김 전 총리와 윤 전 총장이 제3지대를 고리로 연합작전을 펼치는 시나리오가 제기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른바 ‘윤석열·김동연 연대론’이다. 검사인 윤 전 총장과 경제통인 김 전 부총리는 서로를 약점을 커버해줄 수 있는 보완재 관계로 평가받는다. 윤 전 총장의 높은 지지도, 김 전 부총리의 경제비전 제시 능력과 낮은 비호감도 등이 맞물릴 경우 적잖은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야권 한 관계자는 “그야말로 윈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이 제3지대에서 뭉칠 경우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정계개편 주도권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어서다. 여의도 한 분석가도 “JP도 넘지 못한 충청 핫바지론을 탈피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전략적 제휴가 현실화한다면, 대선발 정계개편은 기존 여야와 함께 3지대가 각축전을 벌이는 ‘천하삼분지계’가 될 전망이다. 홍정욱 전 의원 등 외곽 그룹까지 3지대에 가세할 땐 여야 의원 일부도 탈당, 대선발 정계개편의 새판 짜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제3지대로 ‘헤쳐 모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2018년 8월 29일 ‘2018 공공기관장 워크숍’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 전 부총리가 재보선 정국 내내 여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도 이 같은 강점 때문이다. 앞서 김 전 부총리는 여권이 인물난에 시달릴 당시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자로 떠올랐다. 민주당 핵심 전략통은 일제히 “소설 같은 얘기”라고 선을 그었지만, 김동연 카드는 한동안 계속됐다. 김 전 부총리는 재보선 후반까지 계속됐던 박영선 후보 측 러브콜도 끝내 거부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김 전 부총리가 차기 대선 직행을 위한 승부수를 띄운 것으로 분석했다. 여권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LH(한국토지주택공사) 투기 의혹으로 정권 심판론이 거세지자, 당 채널을 가동해 김 전 부총리에게 SOS를 쳤다고 한다. 수세에 몰린 판을 뒤집으려면 거물급 인사의 영입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예상보다 컸던 야권 단일화 컨벤션효과(정치적 이벤트 이후 당 지지도가 상승하는 현상)도 꺼져가던 김동연 카드를 다시 꺼내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박 후보 측을 비롯한 여당의 직간접 러브콜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낙연 전 대표 측 일부 인사도 김 전 부총리 영입전에 뛰어들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이 전 대표는 장고를 거듭하던 박영선 후보를 직접 설득한 핵심 인사로 꼽힌다. 앞서 박 후보는 올해 초 서울시장 선거 출마 선언 직전 김 전 부총리를 찾아가 “(나 대신) 나서 달라”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친문(친문재인)계 핵심 인사도 비슷한 시기에 김 전 부총리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박영선 캠프가 원활히 가동되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까닭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 후보 측 관계자는 “김 전 부총리가 차기 대선으로 직행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야권의 구애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야권 단일화 승리 직후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김 전 부총리를 아우르는 개혁우파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포스트 재보선 정국에서 김 전 부총리의 몸값이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다만 김 전 부총리는 포스트 재보선 정국이 본격화하는 시점까지 외곽 활동에 치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김 전 부총리는 3월 11일 부산 동아대에서 ‘유쾌한 반란-환경, 자신 그리고 사회를 바꾸는 세 가지 질문, 세 가지 반란’을 주제로 특강을 하는 등 정치권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앞서 3월 10일에는 부산 기장군현대차드림볼파크에서 열린 제8회 전국명문고야구열전 첫 경기인 ‘경남고 vs 덕수고’에서 시구를 했다. 고졸 신화 주인공 김 전 부총리는 덕수고의 전신인 덕수상고 출신이다.
김동연 카드의 딜레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대 대선에서 제3지대 구축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1992년 대선 당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를 시작으로, 1997년 이인제 국민신당, 2002년 정몽준 국민통합21, 2007년 이회창 무소속·문국현 창조한국당, 2012년 안철수 무소속 후보 등이 제3후보로 나섰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 이 중 본선에서 두 자릿수를 기록한 후보는 정주영(16.3%) 이인제(19.2%) 이회창(15.0%) 후보 정도다. 정몽준·안철수 후보는 본선 링에 오르지 못했다. 3명의 두 자릿수 후보 중 제대로 된 제3후보는 정주영 후보뿐이었다. 이인제·이회창 후보는 보수진영의 유력한 주자였다.
그만큼 제3지대 성공 확률이 낮다는 얘기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제3지대가 성공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 대선 당시 제3지대 창당을 준비했던 인사는 “정치는 결국 자금과 조직이더라”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야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 두 가지는 어느 정도 있어야 (선거 출마가) 가능했다고 판단했다”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제3지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부연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