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신한은행 SOL KBO리그 정규시즌이 3일 오후 2시, 전국 5개 구장에서 일제히 막을 올린다. 개막에 앞서 구장 정리 중인 잠실야구장. 사진=연합뉴스
개막전은 사실 한 시즌 동안 치러야 할 144경기 중 한 경기일 뿐이다. 이기면 1승, 지면 1패가 전부다. 개막전에서 이긴다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다만 모든 시작은 ‘처음’이라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법이다. 겨울잠을 끝낸 프로야구 개막전의 진기록들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다.
#개막전부터 5시간 넘게 야구한 OB와 한화
겨우내 무척 야구가 하고 싶었던지, 개막 첫날부터 원 없이 게임을 한 팀들이 있다. OB(현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는 1997년 4월 12일 대전구장에서 연장 13회까지 총 5시간 21분에 걸쳐 개막전을 치렀다. 역대 개막전 최장경기 시간. 유일하게 5시간을 넘겼던 개막전이다. OB의 4-2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승리 투수는 이광우, 패전 투수는 구대성이었다.
두 번째로 길었던 개막경기 시간은 2007년 4월 6일 대전 한화 이글스 대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전의 4시간 38분이었다. 두 팀이 연장 12회까지 팽팽하게 맞붙었지만 5-5 무승부로 승자를 가리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역대 최단 시간 개막전 기록도 한화와 SK가 만들어냈다는 거다. 지난해 5월 5일 인천 SK-한화 전은 2007년 개막전의 절반도 안 되는 2시간 5분 만에 끝났다. 한화 외국인 투수 워윅 서폴드가 6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펼치다 7회 2사 후 볼넷으로 첫 주자를 내보낸 경기였다. 일사천리로 상대 타자들을 아웃시킨 한화는 서폴드의 완봉 투구를 앞세워 3-0으로 이겼다. 한화는 이 승리로 개막 9연패 사슬을 끊었다.
그 전까지는 2000년 4월 5일에 열린 잠실 두산 베어스-해태(현 KIA) 타이거즈 전이 20년간 최단 시간 개막전 기록을 유지했다. 잠실에 3만 500명의 관중이 들어찼던 이 경기는 2시간 11분 만에 두산의 2-1 승리로 끝났다. 1992년 4월 4일 광주 해태-태평양 돌핀스전(2시간 14분)과 1984년 4월 7일 광주 해태-롯데 자이언츠전(2시간 15분)도 승부가 빨리 났던 경기다. 선수들은 가뿐하게 개막전을 끝내고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최장 시간과 최단 시간 기록을 모두 보유한 한화는 유독 다이내믹한 개막전 추억을 많이 아로새긴 팀이다. 2000년 4월 5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현대 유니콘스의 개막전은 개막 ‘축포’가 터져도 너무 많이 터진 경기로 남아 있다.
일단 양팀이 도합 14개의 홈런을 쳤다. 역대 개막전 최다 홈런을 넘어 지난해까지 21년간 KBO리그 한 경기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다. 특히 현대 타선은 10개의 홈런과 총 47루타를 만들어 내면서 두 부문 모두 역대 최다 기록을 작성했다. 현대 외국인 타자 톰 퀸란은 3연타석 아치를 그려 홈런으로만 12루타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대는 7회에만 홈런 5개를 몰아쳐 한 이닝 최다 홈런 기록도 작성했는데, 이마저도 5연타수 홈런으로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7회 선두타자 박종호에 이어 박재홍과 에디 윌리엄스가 세 타자 연속홈런을 쳤고, 심재학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뒤에는 퀸란과 이숭용이 다시 백투백 홈런으로 화답했다.
이날 현대가 뽑은 17타점 역시 역대 개막전 한 경기 최다 타점 기록이고, 17득점도 1993년의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역대 개막전 최다 득점 타이기록이 됐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리던 한화 타선의 위력이 무색하게 대전구장 마운드가 현대의 집중 포화로 초토화된 하루였다. 최종 결과는 17-10으로 현대의 승리. 승리투수는 정민태, 패전투수는 한용덕이었다.
물론 애써 준비한 개막전을 아예 치르지 못한 팀들도 있다. 특히 1990년에는 4월 7일 잠실·인천·광주구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개막전 3경기가 모두 우천 취소돼 일제히 하루 뒤로 밀렸다. 개막전 전 경기가 무산된 역대 유일 시즌이다. 이럴 때 가장 허탈한 건 선수들이 아닌 프런트, 특히 마케팅팀 직원들이다. 성대한 개막전 행사를 위해 1년 중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날씨가 너무 흐리거나 추우면 행사 계획과 흥행에 차질이 생긴다. 프로야구 개막일 하루만큼은 하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한화의 전설 송진우는 통산 8회 개막전에 선발로 나서 장호연에 이어 역대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개막전 선발의 영광, 어떤 투수가 많이 누렸나
‘개막전 선발’은 대부분 팀과 감독이 인정하는 최고의 선발 투수가 맡는다. 프로야구 투수, 그중에서도 선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정규시즌 팀의 첫 번째 투수로 등판하는 꿈을 꾼다. OB 장호연은 그 꿈을 가장 여러 차례 이룬 투수다.
개막전에 9번이나 선발로 나섰고, 6승(2패)을 따냈다. 갓 입단한 1983년에 MBC 청룡(현 LG 트윈스)과의 잠실 개막전 선발 투수로 전격 낙점된 게 그 시작이었다. 프로야구 35년 역사에서 개막전에 선발 등판한 신인 투수는 8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1994년 롯데 강상수 이후로는 지난해까지 26년간 맥이 끊겼다. 그런데 장호연은 단지 승리만 따낸 게 아니라 역대 신인 최초의 완봉승까지 그해 개막전에서 이뤄냈다.
이뿐만 아니다. 1985~1990년 6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최다 타이기록)로 나섰고, 1983년의 완봉승을 포함해 개막전 완투승만 세 차례 거뒀다. 이 가운데 1988년 롯데와 개막전에서는 개막전 최초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까지 작성했다. 9이닝 동안 볼넷 2개와 몸에 맞는 공 1개만 내주고 안타와 실점 없이 아웃카운트 27개를 홀로 잡았다. 그 안에 단 한 개의 삼진도 없었다는 게 오히려 특이할 정도다. 공을 99개만 던지면서 효율적인 피칭의 진수를 보여줬다. 장호연이 기록한 6승과 세 차례의 개막전 완투승, 개막전 노히트노런 기록은 앞으로도 쉽게 깨지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한화에 영구 결번(21번)을 남긴 송진우도 ‘개막전 전문가’였다. 6년 연속(2001~2006년)을 포함해 8차례나 시즌 첫 경기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장호연에 이은 통산 2위다. 현대 정민태 역시 7차례나 개막전 선발로 나섰는데, 1997~2004년 6년 연속(해외 리그에 진출한 2001·2002년 제외) 등판이 그 안에 포함된다. 장호연, 송진우와 함께 연속 시즌 개막전 선발 등판 타이기록 보유자다.
그동안 개막전을 빛낸 투수들 중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보기 드물다. 정규시즌에도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앞서 언급한 장호연이 최초였고, 삼성 김상엽(1992~1993년)이 유일하게 2년 연속 개막전 완봉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 외에는 1984년 해태 이상윤, 1989년 해태 선동열, 2002년 한화 송진우, 2005년 삼성 배영수, 지난해 한화 서폴드가 전부다. 그중 배영수는 유일하게 무4사구 완봉승을 해냈다. 그런가 하면 롯데 주형광(1996년)과 한화 정민철(1996~1997년·2회), SK 페르난도 에르난데스(2002년)는 개막전에서 무려 10개의 삼진을 잡아내 역대 개막전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반대로 개막전에서 가장 많은 패전을 기록한 투수는 두산 조계현, 삼성 최동원, 한화 류현진, KIA 타이거즈 윤석민이다. KBO리그에서 한 획을 그은 투수들이 나란히 개막전 3패로 최다패의 아쉬움을 삼켰다. 개막전에 선발 등판하려면 팀 내 최고 투수로 인정받아야 하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외국인 투수들의 전유물이 된 개막전 선발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는 국내 선발 투수들의 개막전 등판 기회가 점점 줄었다. 도입 초창기까지만 해도 개막전 선발만큼은 팀을 상징하는 국내 에이스들에게 맡겼지만, 1999년 마이클 앤더슨(쌍방울 레이더스)이 최초의 외국인 개막전 선발 등판 기록을 세운 뒤 점점 판도가 달라졌다. 2001~2003년엔 8개 구단 중 3팀이 외국인 선발을 내세운 데 이어 2004년엔 최초로 전체의 절반인 4명이 외국인으로 채워졌다. 8개 구단이 모두 국내 투수를 내세운 2009년이 오히려 이례적인 시즌으로 여겨졌다.
외국인 투수들의 개막전 선발 점유율은 2010년을 기점으로 점점 더 높아졌다. 그해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 두산, 한화, 롯데, SK가 외국인 에이스를 개막전 선발 투수로 기용했다. 최초로 국내 투수들보다 외국인 투수들의 수가 더 많아진 시즌이다. 이후에도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됐다. 처음으로 10개 구단이 개막전을 치른 2015년엔 KIA 양현종을 제외한 9명이 모두 외국인이었다.
급기야 2017년엔 프로야구 출범 이후 최초로 개막전 선발 전원이 외국인 투수로 채워졌다. 2018년 개막전엔 윤성환(삼성 라이온즈), 2019년엔 양현종(KIA)과 김광현(SK)만이 국내 투수의 자존심을 세웠을 정도다. 외국인 투수 중 개막전 선발을 가장 많이 맡은 선수는 두산 더스틴 니퍼트다. 6번(2011~2014 연속 등판 포함)이나 팀의 한 시즌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 다음은 KIA와 두산에 몸 담았던 다니엘 리오스다. 리오스는 한국에서 뛴 5시즌(2003~2007) 동안 매년 개막전 선발 투수로 출격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