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4월 2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고 김종필 전 총리(JP)는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 핫바지론’을 들고 나왔다. JP는 가는 곳마다 “우리를 핫바지 취급한다”고 했다. ‘핫바지’는 시골 사람이나 무식하고 게으른 사람을 놀리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경상도가 다 해먹고 충청은 홀대를 받는다”라는 지역 정서를 파고든 것이었다.
JP의 전략은 통했다. JP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 충남지사, 충북지사를 싹쓸이했다. 이 기세를 몰아 1996년 총선에서 선전했고, 이는 DJP연합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자민련은 충청 지역당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영원한 2인자’ JP 역시 ‘충청 맹주’에 그쳤다.
그 후 충청권 여러 정치인들이 큰 꿈을 품었지만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이인제 정운찬 반기문 안희정 등이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경우 2014년 지지율 1위까지 오르며 신드롬까지 일으켰지만 3지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중도하차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경우 지역에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성추문으로 정계를 떠났다.
이번엔 ‘윤석열’이다. 윤 전 총장 고향은 서울이지만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충남 논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충청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총선 때 몇몇 후보들은 선거 유세에서 윤 전 총장을 두고 ‘공주 출신’이라고 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윤석열의 ‘충청 대망론’은 예전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일단 윤 전 총장은 충청 사람이 아니다. 지역적 기반이 충청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윤 전 총장은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다. 3지대 한계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다. 지금처럼 여야에 모두 실망한 중도층이 많을 땐 더욱 그렇다. 반기문의 경우 대선을 3년 넘게 남겨둔 시점에 지지율이 올랐다가 빠졌지만 윤 전 총장은 이제 불과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지지율 1위다. ‘이번엔 다른 것 같다’는 게 충청권 밑바닥 정서다.”
정가에선 김동연 전 부총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그 파괴력이 상당할 것이란 전망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이러한 기류는 일요신문이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3월 28일부터 3월 30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 ±3.1%포인트) 결과에도 나타났다. 전국에서 윤 전 총장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곳은 대전·세종·충청(관련기사 대선후보 선호도 윤석열 42.5% ‘결집’ 이재명 24.0% ‘하락’)이었다. 이곳에서 윤 전 총장 지지율은 47.6%로 2위인 이재명 경기지사(20.1%)를 27.5%포인트(p) 앞섰다. 윤 전 총장의 전국 평균 지지율 42.5%보다는 5.1%p 높았다(자세한 사항은 조원씨앤아이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또 대전·세종·충청은 문재인 대통령 국정평가 지지율이 31.2%로 보수 텃밭 대구·경북(28.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부정평가의 경우 대구·경북보다 0.1%p 높은 68.8%였다. 그만큼 충청권에선 정권 교체 열망이 높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점은 ‘차기 정부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충청권이 다른 지역들보다 ‘3지대 정권 교체’ 응답(관련기사 차기 정권 누가? 국민의힘 39.6% vs 민주당 33.7%)이 높았다는 것이다. 대전·세종·충청은 3지대 정권 교체가 22.5%로 부산·울산·경남(21.7%)과 함께 유일하게 20%대를 기록했다. 이처럼 충청권에서 윤 전 총장 지지율 및 3지대 정권 교체가 가장 높은 응답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대망론’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가에서 ‘충청 대망론’이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윤 전 총장 외에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존재감 때문이다. 김 전 부총리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 문재인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였던 김 전 부총리 역시 차기에 뜻을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가에선 김 전 부총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그 파괴력이 상당할 것이란 전망이 주를 이룬다.
이재명 이낙연 ‘2강’ 외에 또 다른 후보를 찾고 있는 여권, 그리고 윤석열 전 총장의 3지대 신당을 우려하는 국민의힘 모두 김 전 부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문재인 정부 첫 경제부총리였던 김 전 부총리를 우리가 데려오면 그것 자체로 여권에 상처가 된다. 또 경쟁력 있는 후보를 갖추게 된다”면서 “김 전 부총리 영입을 삼고초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김 전 부총리의 민주당행에 무게를 두고 있긴 하다. 민주당 재선 의원은 “지금 민주당은 새로운 후보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 전 부총리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예전이라면 본인의 위치가 애매했겠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환영받으면서 들어올 수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 초대 부총리였던 그가 국민의힘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또 3지대엔 ‘지지율 1위’ 윤석열이 버티고 있는데 쉽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전 부총리가 당장에 대선 출마를 선언하거나 특정 정당에 들어가는 게 아닌, 3지대가 주도하는 정계개편에 합류할 것이란 가능성도 거론된다. 윤석열 전 총장, 김동연 전 부총리 등을 비롯한 잠룡들이 ‘헤쳐 모여’한 뒤, 3지대 신당을 띄우는 그림이다. 최근 여의도에서 회자되는 ‘윤석열-김동연 3지대 연대론’(관련기사 여·야·3지대 골라골라~ ‘포스트 재보선’ 김동연 몸값 급등의 비밀)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