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환이 지난 16일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시상대에 올라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지난해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끝나고 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누구라도 실패를 맛보면 싫어지고 포기할 수 있잖아요. 저도 시련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고 자꾸만 그쪽으로 집중이 됐었죠.”
11월 20일 광저우 아시안게임타운 메인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만난 박태환은 불과 11개월 전까지만 해도 은퇴를 생각했음을 털어놨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다 박태환은 반가운 희소식을 전해 들었다. 대한수영연맹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능한 호주인 코치를 박태환 전담코치로 계약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급기야 1월 8일 호주에서 날아온 마이클 볼 코치(48)와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표류하던 박태환이 구조선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박태환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면서 이원화된 훈련을 소화해 왔다. 국내 훈련시에는 태릉선수촌에서 대표팀과 함께 훈련했고, 해외 전지훈련을 나갈 때는 후원사 SK텔레콤 전담팀에서 ‘급구’한 외국 코치와 개인 훈련을 했다.
맞춤 훈련이 필요했지만 대한수영연맹과 SK텔레콤의 대화가 원활치 못하면서 훈련은 그때그때 달랐다. 훈련에 일관성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박태환의 훈련을 놓고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전담팀 간에 마찰도 생겼다. 그 결과는 부실한 훈련으로 나타났고 결국 세계선수권대회 직후 박태환은 “전담팀과 대표팀 사이에서 힘들었다”며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토로했다. 그제야 연맹과 SK텔레콤은 박태환이 요구한, 전담 지도자 찾기에 나섰다. 그렇게 찾아낸 지도자가 바로 볼 코치였다. 호주에서 23년째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볼 코치의 이력은 화려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및 2008 베이징올림픽 등에서 수영 강국인 호주대표팀을 이끌었다. 특히 중장거리 등 다양한 영법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볼 코치와의 만남은 박태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박태환은 “볼 코치님을 만나니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며 의지를 불태웠고 볼 코치와의 첫 해외 전지훈련을 마친 뒤에는 “볼 감독님과 함께 훈련하면서 수영의 즐거움을 다시 찾았다”고 말해 슬럼프에서 벗어났음을 알렸다.
이번 대회에 돌입하기 직전 광저우에서 기자들과 만난 볼 코치는 박태환이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낼 것 같으냐는 질문에 “박태환을 올해 초 처음 만났는데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에는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한다”며 일찌감치 박태환의 금빛 레이스를 알렸다.
볼 코치가 예고한 대로 결과가 나타났다. 박태환은 14일 광저우 아오티아쿠아틱센에서 벌어진 자유형 200m로 광저우아시안게임의 스타트를 끊었다. 자유형 200m부터 박태환은 라이벌 장린, 쑨양(이상 중국)과 맞붙었다. 특히 장린은 박태환의 오랜 라이벌이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200m, 400m, 1500m 금메달을 휩쓴 박태환에게 밀려 은메달만 목에 건 장린이었다. 그는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박태환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 당시 작성한 자유형 400m 아시아신기록을 갈아치운 뒤 “박태환의 사진을 방에 붙여놓고 훈련했다. 이제는 박태환 사진을 떼어버리겠다”며 기분을 냈다.
그러나 더 이상 장린이 기분 낼 일은 없었다. 박태환은 2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작성한 자신의 아시아기록을 0.05초 앞당기며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어냈다. 장린은 4위였다.
이후에도 박태환의 기록 레이스는 계속됐다. 이어 벌어진 자유형 400m와 100m에서 자신의 기록을 연거푸 단축시키며 금메달 수를 세 개로 늘렸다.
▲ 박태환이 지난 14일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스타트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첨단 신소재 수영복 착용이 금지된 올해 선수들의 기록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일궈낸 놀라운 결과였다. FINA(국제수영연맹)는 2008년부터 첨단 전신수영복을 입고 경기에 나선 선수들이 무더기 세계신기록을 양산, 무려 130개의 세계신기록을 내놓자 논란 끝에 올해부터 이 수영복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신 수영복 적응에 어려움을 토로, 이를 입지 않았던 박태환은 선수들의 기록이 후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대회에서 기록을 단축하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 결과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물론 만족합니다. 금메달 하나 따기도 힘든데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면 굉장히 웃기겠죠”라면서 “그러나 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도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고된 아픔과 실수를 맛보면 더 많은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성숙한 답변을 내놨다. 1년 전 뼈아픈 실패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음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마지막 개인 종목이었던 자유형 1500m에서 4관왕에 실패했기 때문. 6일간 쉼 없는 레이스를 치러온 터라 힘이 달렸다. 박태환은 1500m 결승에서 장린의 아시아기록을 무려 10초 이상 단축한 쑨양(14분35초43)에 이은 2위(15분01초72)로 은메달을 추가해냈다. 장린은 3위였다.
박태환은 이날 시상식 도중 장린으로부터 “고맙다”는 뜻하지 않은 인사를 받았다. 100m에서 우승했던 전날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태환의 답변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당시 중국 기자들로부터 이번 대회에서 부진을 보인 장린에게 충고나 지적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박태환은 “충고나 지적은 맞지 않습니다. 저 역시 지난해 시련을 겪은 뒤 열심히 노력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라며 “장린도 작년 세계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만큼 이번 시합이 지난해의 저처럼 큰 긴장과 압박을 갖고 경기했을 겁니다”라며 장린을 감쌌다. 라이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한 뼘 더 성장한 박태환이었다.
‘부진한 성적’ 장린 격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박태환이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2012년 런던 올림픽으로 향해 있다. 그리고 런던 올림픽에서의 성공을 위해 장거리 1500m는 포기해야 한다고 볼 코치는 조언하고 있다. 박태환은 베이징올림픽에서 세 종목에 출전해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200m에서 동메달을 따냈지만 1500m에서는 결선 진출에 실패한 바 있다.
경기 직후 기자와 만난 볼 코치는 “1500m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육상으로 따지면 우사인 볼트인데 그에게 장거리를 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어 “태환이의 1500m 기록은 세계 기록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제는 태환이가 결정을 할 시간이 왔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박태환에게 1500m는 미련이 많은 종목이다.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내기는 했지만 큰 대회마다 고배를 마셨다. 이 때문에 박태환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무엇보다 1500m에서 좋은 기록을 내고 싶어요”라며 개인적인 욕심을 밝힌 바 있다. 박태환은 “아무래도 쑨양 선수가 워낙 기록이 좋아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 같아요. 세계기록과 차이가 있는 것도 맞고요.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라며 말을 아꼈다. 아직은 무엇이든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박태환이다.
광저우=박지은 CBS 노컷뉴스 기자
▲ 박태환은 경기 전 항상 음악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지난 16일 남자 자유형 400m에 출전하기 전 헤드폰을 착용한 모습. 연합뉴스 |
애인에게만 알려줄 거예요~
플랫폼에 서기 직전까지 박태환의 귀에는 큰 헤드폰이 걸려있다. 입고 나온 상의를 벗을 때만 MP3 옆에 잠시 헤드폰을 벗어둔 뒤 곧바로 다시 헤드폰을 귀에 거는 박태환이다. 선수 소개가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헤드폰을 벗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박태환이다.
이 때문에 모두가 궁금해 한다. 과연 박태환은 무슨 음악을 듣고 있을까. 20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타운 메인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어김없이 이 질문이 나왔다. 박태환의 답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였다.
박태환이 자신이 듣는 음악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과 똑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음악들을 즐겨듣기 때문이라고.
“제가 시합 전에 듣는 음악은 제 속 마음과 똑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절대 알려드릴 수 없어요. 한국 음악을 듣고요, 경기 전에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 이 정도만 알려드릴 수 있어요.”
이어진 박태환의 말에 기자회견장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저한테 대시를 하세요. 넘어가면 알려드릴 수 있어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음악을 듣는 만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재치있는 답이었다.
박태환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에도 경기 중 들었던 음악을 공개해달라는 질문에 “말할 수 없다”며 입을 꾹 닫았다. 인기 걸그룹 ‘원더걸스’의 음악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해볼 길은 없었다. 박태환의 말대로 그의 음악을 알 수 있는 길은 박태환의 연인이 되는 길 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