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010년 ‘한국바둑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자금까지 줄곧 호찌민에 거주하며 베트남에 한국 바둑을 전파하고 있다. 베트남 축구에 박항서 감독이 있다면 베트남 바둑엔 이강욱 3단이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에 나가기 어려워진 요즘 베트남의 바둑 소식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강욱 3단에게 유선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인터넷 대국 중인 하꾸윈안. 한국 프로에 2, 3점으로 버틸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사진=이강욱 제공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의 바둑 현황이 어렵다. 근황은 어떤가.
“이곳 베트남도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 베트남 정부의 강력한 봉쇄 정책으로 지역 내 전파는 거의 없지만 양국에서의 격리기간(1개월)을 고려한다면 한국으로의 왕래가 사실상 막혀있어서 가족들을 만난 지 1년이 훨씬 넘었다. 지역 내 확진자가 나올 경우 베트남의 강력한 봉쇄 정책은 외국인으로서는 활동하기도 어렵고 감당하기도 힘든 실정이라서 여러모로 힘이 든 요즘이다.”
―현재 베트남 바둑 현황은. 바둑 인구나 교육기관, 그리고 실력 등이 궁금하다.
“현지에서 베트남의 바둑 인구는 5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아직까지 바둑이 대중적으로 전파됐다고 할 수는 없다. 식민지 시절의 유산이겠지만 베트남은 바둑보다 체스가 더 인기가 있다. 바둑 전문 교육기관은 전무하고 하노이, 호찌민, 다낭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소규모 바둑클럽들이 운영되고는 있다. 거기에는 2010년 저의 베트남 첫 파견 당시의 제자들이 많이 활동 중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베트남의 대표급 선수들은 타 동남아 국가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의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한다면 베트남 남자 대표는 2점, 여자대표는 2점에서 3점 정도의 실력이 아닐까 싶다.”
베트남에서 10년 넘게 바둑을 보급 중인 이강욱 3단. 사진=한국기원 제공
“베트남에서는 체스나 장기에 비해 바둑은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은 비인기 종목이라서 일반 대중들에게 바둑을 보급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열악한 바둑 환경이나 저변에 비해 대표급 선수들은 인근 동남아 바둑 강국인 태국, 싱가포르 등과 대등한 실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 선수들을 집중 지도하고 있다. 얼마 전 치러진 센코배 세계아마여류 선수권 대회에서 제자 하꾸윈안(Ha Quynh Anh)이 베트남 바둑역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꾸윈안의 우승 소식이 한국에서 화제였다. 당시 상황을 알려 달라.
“15세 여자 선수지만 이미 베트남 여자 선수의 수준을 넘어 남자 정상권 선수들과도 비등하게 버텨낼 정도로 수준이 높다. 물론 한국이라면 턱없이 부족할 수준이지만 열악한 베트남의 바둑환경을 고려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대국을 통해 부족한 실전을 채운다고는 하지만 프로지망생들 같은 다양한 상대 및 동년배 라이벌과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 가는 한국과 같은 선순환 구조는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마침 하꾸윈안에게도 큰 동기 부여가 필요한 때에 센코배 참가 소식은 선생인 제게도 적당한 자극이 됐다. 그래서 주 3회 2~3시간의 정규 수업 외에 휴일에도 강도 높은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한국, 중국 등이 빠졌다고는 해도 우승은 뜻밖이지 않았을까.
“사실 요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하꾸윈안에게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며 채찍질하곤 했지만, 자전거로 왕복 2시간 거리일 정도로 집이 멀고 학업도 병행해야 하니 제 마음처럼 쉽지는 않은 형편이었다. 그래도 내심 실력에 대해서는 자신은 있었다. 한중일과 대만을 제외한 동년배 여자선수라면 ‘누구와 두어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마침 이번 센코배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올해 센코배에는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이 참가했다. 프로 제도가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바둑 강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그리고 같은 동남아지만 베트남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바둑 저변이 넓은 태국 싱가포르 등 어디 하나 만만한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미국 대표는 아마7단의 기력과 함께 중국식 이름이 표기되어 있어(중국계 미국인) 더욱 긴장케 했었다. 게다가 ‘제발 미국만 피하자’는 나의 안일한 생각을 꾸짖듯 하꾸윈안의 첫 상대는 미국선수로 결정돼서 대회를 앞둔 호찌민시 바둑클럽에선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던 게 사실이었다.”
―베트남에서도 기대가 컸을 것 같다.
“최근의 모든 국제대회가 그러하듯 센코배 또한 비대면 온라인 대국으로 진행됐다. 대국장은 우리가 항상 바둑수업을 함께하는 호아루 체육센터에 마련되었지만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대국 모습을 촬영하고 대국자 이외의 출입을 삼가야 하기에 나와 응원단은 바둑판을 들고 인근 커피숍에 검토실을 차렸다. 다행히 하꾸윈안은 중국 이름의 미국 대표를 맞아 초반부터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 수읽기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덕분인지 돌들이 부딪히기 시작하자 더욱 차이를 벌려갔다. 4강 상대는 독일이었지만 역시 무난히 고비를 넘겼다. 결승 상대가 베트남의 라이벌 태국 선수여서 긴장했는데 오히려 태국 선수가 부담을 느낀 건지 굳은 행마를 보이더니 결국 제풀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우승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난 2019 센코배 기념촬영. 오른쪽 세 번째가 베트남의 하꾸윈안 선수다. 사진=이강욱 제공
―베트남 현지 반응은 어땠는가.
“비록 동북아의 바둑 강국들이 빠진 아마추어 대회이지만 세계바둑대회의 우승국이 베트남이라는 사실은 센코배를 관심 있게 지켜본 전 세계 바둑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베트남 바둑 역사에 있어서도 역대 최고 성적이자 세계대회 첫 우승이라는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센코배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많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바둑인들은 이번 성과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우승을 자축하면서 ‘베트남 바둑도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의미 있는 첫 우승이다.”
―동남아 국가 간 바둑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던데 실상이 어떤지 궁금하다.
“중국계 강자들이 많은 싱가포르, 동남아 최대 바둑 인구를 자랑하는 태국, 일본에서 프로기사를 배출해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나름대로 동남아 국가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특히 태국은 모 대기업 입사에 바둑 가산점이 있을 정도라고 들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어린 시절 일찌감치 일본에서 바둑수업을 받고 일본기원의 외국인 특별 입단제도로 입단에 성공한 케이스가 있고, 말레이시아에도 일본 바둑 유학 이후 외국인 특별 입단제도로 입단에 성공한 친구가 있다. 일본기원의 경우 외국인 특별 입단제도가 있는데 프로제도가 없는 나라의 외국인이 입단대회 본선 15국 중 8국 이상을 승리하면 특별 입단의 혜택을 주고 있다. 우리도 바둑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기원에서 한번 검토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