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양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이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과 악수하는 장면.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김여정이 이번 담화문을 낸 이면엔 3월 26일 ‘서해 수호의 날’ 행사가 있다. 이날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연설이 북한 지도부의 심기를 긁은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3월 26일 연설에서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언급하며 “대화 분위기에 어려움을 주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세계 최고 수준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 연설에 대해 김여정은 “북과 남의 같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진행한 탄도미사일 시험을 놓고 저들이 한 것은 조선반도(한반도) 평화와 대화를 위한 것이고 우리가 한 것은 남녘 동포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대화 분위기에 어려움을 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니 그 철면피함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김여정은 “분계선 너머 남녘 땅에서 울려나오는 잡다한 소리들을 접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아연해짐을 금할 수 없다”면서 “특히 남조선 집권자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할 때가 더욱 그렇다”고 했다. 김여정은 “비논리적이고 후안무치한 행태는 우리 자위권을 유엔 결의 위반이니 국제사회에 대한 위협이니 걸고드는 미국의 강도적인 주장을 덜함도 더함도 없이 빼닮은 꼴”이라면서 “미국산 앵무새라고 칭찬해줘도 노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0년 6월 16일 폭파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사진=연합뉴스
2020년부터 김여정은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담화를 줄곧 발표했다. 2020년 3월 미사일 도발에 대한 청와대 유감 표명에 강력히 반발했다. 6월엔 한국 측 탈북민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강력히 비난했다. 김여정은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려하던 사태가 터졌다.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겠다는 김여정의 위협이 있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는 정말 터져버렸다.
그 뒤로 잠잠하던 김여정 담화문 정치는 2021년 들어 다시 기지개를 켰다. 1월 12일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을 일컬어 “특등 머저리”라고 칭했다. 그리고 3월 들어 다시 한번 미사일 도발과 관련한 문 대통령 연설 내용을 꼬투리 잡았다. ‘특등 머저리’에 이어 ‘미국산 앵무새’라는 격한 어휘를 쓰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2018년까지 훈훈한 분위기를 보이던 남북 대화 국면은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확연히 경색되는 양상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일요신문과 만나 현재 북한이 한국 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을 전했다. 소식통은 “지금 북한 지도부는 문재인 정부에 극도로 실망한 상태”라고 귀띔했다. 그는 “김정은이 집권한 뒤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줄곧 북한에 대해 강경정책을 취해왔다”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대화 국면’을 조성하려 하자 북한 내부에서의 기대감은 상당히 높아졌다”고 했다.
소식통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대화하는 방식으로 평화무드가 조성된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면서 “이때만 해도 북한 지도부는 ‘한국이 대북 제재 국면을 돌파하는 데 열쇠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 중재자로 적극 나서면서 기대감이 커졌다. 그러나 남북 대화와 한미 대화 사이에서 북한과 미국의 이견이 드러났다. 점진적인 제재 완화와 일괄타결식 제재 완화를 두고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갈렸다. 그 중간에서 한국 정부의 중재가 애매했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아무것도 한국이 얘기한 대로 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엔 혹시나’ 했던 북한 지도부가 ‘이번에도 역시나’라고 느끼게 된 과정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 김여정.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다른 북한 소식통은 본지와 통화에서 북한과 미국이 서로 원했던 방식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소식통은 “북한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식으로 협상 범위를 넓혀가는 점진적 비핵화를 주장한 반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한 비핵화에 전제한 일괄타결식 비핵화를 원했다”면서 “그 사이에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등 실무자가 말을 전함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 북한 내 전력공급 등 카드를 준비했고, 이와 별개로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협상안을 도출하는 외교 행보에도 집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 평화무드가 절정에 달했던 시점은 2018년이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평화무드가 조성된 뒤로 4월과 5월 두 차례 ‘깜짝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그리고 6월엔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때까지 북한은 ‘한국이 우리 입장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거다. 그리고 9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다시 열렸고 해를 넘긴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7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하노이에 도착한 김정은은 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기서부터 ‘한국 중재론’에 균열이 생겼다.”
소식통은 “하노이 회담 이후 그간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쌓아 왔던 신용도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감지됐다”면서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성사된 남북미 정상회동에선 문재인 대통령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옅어졌다”고 했다. 그는 “대북제재 완화를 비롯한 각종 지원에 대한 약속이 북한 지도부가 만족할 만큼의 속도로 진행되지 않자 한국을 패스하는 형식으로 외교 현안을 풀어나가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성사된 남북미 정상회동. 이날 이후 김정은이 북미 정상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진=연합뉴스
한 북한 전문가는 조 바이든 신임 행정부가 수립된 뒤로 한국 정부가 북미 대화에 끼어들 여지는 더욱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으로 대북 문제 해결에 나서는 상황”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을 대신해서 설득해줄 가능성도 적어졌을 뿐 아니라, 한국이 조절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입장에선 좀 더 강경한 방식으로 미국과 직접 제재 완화 이슈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면서 “여기다 한국은 완전히 미국 쪽이라는 전제를 두고 ‘한반도 중재자론’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북미 간 외교전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가운데, 북한은 최근 미사일 도발을 통해 긴장 상황을 조성하는 모양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월 6일 ‘당 세포비서 대회’를 열어 내부적인 혁신 작업에 돌입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북한 실무자들과 대화 물꼬를 튼 뒤 남북 화해무드를 본격 조성했다. 평창올림픽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이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뿐 아니다. 북한은 4월 6일 체육성이 운영하는 ‘조선체육’ 홈페이지를 통해 도쿄올림픽 불참 의사를 밝혔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총회에서 악성 바이러스 감염증에 의한 세계적인 보건위기 상황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원들 제의에 따라 제32차 올림픽 경기대회에 참가하지 않기로 토의 결정했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 임기 말 마지막 남아있던 남북대화 실마리가 차단된 셈이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에 대해 “코로나19 방역을 명분 삼아 북한이 대화 채널을 수거해가는 ‘밀고 당기기’를 시작한 셈”이라면서 “올림픽을 매개로 대화를 시도하려던 한국 정부와 성공적인 올림픽 성공 개최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일본 정부가 동시에 난감해질 만한 상황을 연출했다”고 분석했다.
당초 외교가에선 도쿄올림픽에서 남북-북미-북일 대화가 활발히 이뤄져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진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북한이 도쿄올림픽 불참을 알린 뒤 미국에서도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불참 가능성 검토 이야기가 나오면서 미일-북중 간 신경전이 불거지기도 했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4월 7일 언론 브리핑에서 중국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한 압박 차원으로 동맹과 베이징동계올림픽 공동 보이콧을 논의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백악관은 “관련 논의를 한 적 없다”면서 진화에 나섰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