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신인 투수 염종석은 다승 공동 1위, 평균자책점 1위 등의 기록을 남기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2년 롯데의 우승은 아직까지 팀 역사상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프로야구 롯데 ‘마지막 우승’
1992시즌 KBO리그에서는 롯데 자이언츠가 ‘최동원 시대’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롯데는 페넌트레이스에서 3위에 그쳤고 정규리그 우승팀과 10경기 이상 승차가 벌어졌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는 감격을 누렸다. 그러나 롯데는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현재까지 ‘마지막 우승’으로 남아 있다.
마운드에선 고졸 신인 염종석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데뷔 첫해임에도 신인답지 않은 투구로 다승 공동 1위(17승), 평균자책점 1위(2.33)에 오르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왕은 당연지사였다. 타선에서는 김민호, 김응국, 박정태, 전준호, 이종운 등이 정교한 타격으로 힘을 보탰다. 이들은 공격부문 1위 타이틀은 없었지만 전원 3할을 웃도는 타율을 기록했다.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는 아쉽게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압도적 전력을 자랑하며 정규리그 정상에 올랐다. 특히 장종훈은 1991시즌에 이어 2년 연속 MVP를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연습생 신화’로도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1992년 41홈런을 기록, KBO리그 역사상 최초 한 시즌 40개 이상 홈런을 때려냈다. 41홈런 기록은 1998년에야 타이론 우즈가 깼다. 이 외에도 빙그레에는 송진우, 한용덕 등 당대 최고 투수들이 있었고 정민철이 신인으로 1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8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또 1992년 열린 1993 KBO 신인드래프트는 KBO리그 역대 최고 드래프트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드래프트에서 신인 타이틀을 단 선수들은 이후 오랜 기간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1차지명에서 구대성(빙그레), 양준혁(삼성 라이온즈), 이종범(해태 타이거즈), 이상훈(LG 트윈스)이 지명됐고 마해영(롯데)은 2차지명에서 선택을 받았다. 이들 모두 선수생활 중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이 있다. 구대성과 이종범은 KBO MVP도 수상했다.
대학 졸업과 상무 복무 이후 1992년 프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홍명보는 소속팀 포항을 우승으로 이끌고 리그 MVP까지 수상하며 가치를 증명했다. 사진=연합뉴스
K리그의 1992년은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가 프로 무대에 선을 보인 해였다. 홍명보는 프로 데뷔 이전 대학생 시절부터 대표팀에 발탁돼 월드컵 등 굵직한 대회에 나섰다. 대표팀 주축으로 자리 잡으며 이미 스타로 성장한 그는 첫발을 내디딘 프로 무대에서 소속팀의 리그 우승, 개인 MVP 수상을 달성하며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홍명보 외에도 박태하, 박창현 등을 내세운 포항제철(현 포항 스틸러스)은 경쟁자 일화(현 성남)를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구단 역대 세 번째 우승으로 포항이 본격 명문 구단으로 거듭난 계기가 됐다.
포항을 이끌던 이회택 감독 개인으로선 1988년에 이은 두 번째 우승이었다. 그는 첫 우승 이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고 1990 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했지만 3패로 체면을 구겼다. 대표팀 사령탑에서 내려온 이후 친정팀으로 돌아와 다시 우승컵을 들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1992시즌은 K리그 역사 일부를 바꾼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당시 강팀으로 거듭나던 일화는 이례적으로 골키퍼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를 수혈했다. 그 주인공은 당시 소련(현 타지키스탄) 출신의 사리체프, 훗날 대한민국 국적을 따며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커리어를 이어간 인물이다.
사리체프는 데뷔 첫해부터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일화가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다른 팀들도 외국인 골키퍼를 앞다퉈 영입하는 계기가 됐다. K리그는 다수의 구단이 외국인 골키퍼를 중용하자 ‘국내 인재 육성’이라는 명목 아래 골키퍼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 기용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외국인 골키퍼 사리체프의 독보적인 기량이 리그 제도를 변모시킨 것이다.
#농구대잔치 ‘기아 왕조’의 절정
1992년을 전후로 한국 농구는 기아자동차(현 현대모비스 피버스)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한기범, 김유택, 허재 등이 주축으로 이끌던 기아는 1990년 강동희까지 합류하며 더욱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모두 중앙대 출신으로 학창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다. 김유택, 허재, 강동희는 허-동-택 트리오로 불리며 농구대잔치를 휩쓸었다. 기아는 1988-1989시즌부터 농구대잔치 5연패를 달성했다. 1992년은 5연패 중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한 해였다.
기아자동차는 5연패 과정에서 5명의 스타들이 MVP를 나눠 가졌다. 첫 우승부터 유재학, 한기범, 정덕화가 MVP를 수상했고 1992년의 주인공은 ‘농구대통령’ 허재였다. 이듬해는 강동희가 이어갔다. ‘기아 우승의 최대 적은 기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3차 대회로 나뉘어 치러진 1991-1992시즌에는 1차 대회에서 최종 4위에 머물렀지만 2차 대회부터 고삐를 당겨 15연승으로 3차대회, 챔피언결정전까지 우승했다.
1992년은 연세대가 본격 저력을 발휘한 해이기도 했다. 1, 2, 3차 대회 모두 결선리그까지 진출해 4위 이내 성적을 기록했다. 이 시즌부터 기존 전력인 정재근, 오성식, 문경은 등에 신입생으로 이상민이 가세했다. 점차 전력을 강화하던 연세대는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이 합세하며 2년 뒤인 1994년 대학팀으로선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했다.
#배구대제전, 단 한 번뿐인 상무의 우승
농구가 KBL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를 치르던 것처럼 배구 역시 V리그를 출범하기 전 실업리그가 열리고 있었다. 1995년부터 ‘슈퍼리그’라는 타이틀이 붙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세미프로 리그가 열렸다. 이는 ‘배구대제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슈퍼리그 개편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화재가 독주체제를 걸었던 것과 달리 이전까지는 고려증권, 현대자동차 등이 우승을 경쟁했다. 그러던 중 1992년은 상무가 우승을 가져갔다. 당시 우승은 상무 배구단 역사상 유일한 우승으로 남아 있다.
상무의 우승의 뒤에는 ‘컴퓨터 세터’ 신영철이 있었다. 배구 명문 경기대 졸업 이후 한국전력에서 활약하던 신영철은 군 복무를 위해 상무에서 활약했다. 당대 최고 세터였던 만큼 상무가 최상의 전력이 아니었음에도 절묘한 경기 운영으로 우승을 이끌었다. 상무를 우승으로 이끈 공을 인정받아 신영철은 MVP에 선정됐다.
또 1992년은 훗날 김세진이 한양대 소속으로 배구대제전에 모습을 드러낸 해다. 훗날 ‘월드스타’로 성장한 김세진은 이해 신인상을 받으며 잠재력을 보였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