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자금 조달 능력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지난 11월 16일 현대건설 채권단 발표를 통해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가려졌지만 이를 둘러싼 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당초 입찰가가 3조~4조 원대일 것이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5조 5100억 원을 써낸 현대그룹이 과연 자금을 제대로 조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현지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는 1조 2000억 원에 있다. 현대건설 인수자금의 22%에 이르는 이 자금이 현대건설 인수용으로 사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이다. 지난 11월 24일 현대건설 최대주주(지분율 11.13%)인 한국정책금융공사의 유재한 사장이 출석한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의원들은 현대그룹의 프랑스 예금 1조 2000억 원의 자금 성격 공개를 촉구했다. ‘현지금융으로 조달한 자금은 현지법인 등과 국내 거주자 간의 인정된 경상거래에 따른 결제자금의 국내 유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예치하거나 국내로 유입할 수 없다’는 외국환거래규정 8-1조 3항을 근거로 한 것이다.
관련 규정에 저촉될 경우 현대그룹 프랑스 예금을 현대건설 인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며 이 경우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대금을 치르지 못해 인수전이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셈이다. 이날 유재한 사장은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 예치된 현대그룹 대출금 1조 2000억 원을 증빙할 수 있는 대출 계약서(증빙자료) 제출을 현대그룹에 요구했으나 제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1조 2000억 프랑스 예금 성격 논란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정해진 법에 따라 정당한 평가를 받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며 자금 조달 계획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인수자금 출처 논란이 재계와 금융권은 물론 정치권 그리고 시민단체로까지 번져나가면서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에 재무 투자를 한 동양종금증권의 8000억 원대 투자금에 대한 풋백옵션 논란 또한 현 회장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풋백옵션은 주식 등 금융자산을 약정된 기일이나 가격에 매각자에게 되팔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과거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했다가 대우건설 풋백옵션에 따른 대규모 손실로 결국 워크아웃 사태를 부른 일이 비교선상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동양그룹의 최근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점도 향후 변수로 거론되고 있다.
이처럼 곱지 못한 시선을 현 회장은 회장 취임 초기부터 겪은 바 있다. 지난 2008년 8월 남편 정몽헌 회장의 사망 이후 그해 10월 회장직에 오르면서 시숙부인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와 이른바 ‘시숙부의 난’으로 불린 경영권 분쟁을 치러야 했다. 정상영 명예회장 측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기습 매집에 맞서 현 회장은 현대가에 도움을 청했지만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나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는 중립을 지켜 사실상 현 회장의 청을 거절했다. 당시 재계 일각엔 “살림만 했던 여자가 그룹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라며 현 회장을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있었다.
이때 현 회장이 뽑아든 카드는 여론에 대한 호소였다. 현대엘리베이터 국민주 1000만 주 공모 계획을 진행했다가 무산됐지만 이는 “조카 무덤에 아직 잔디도 돋아나기 전에 숙부가 조카며느리 회사를 빼앗으려 한다”는 동정론을 낳는 계기가 됐다. 이후 현 회장 측은 KCC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이면서 ‘특정 기업의 지분 5% 이상을 매입할 경우 5일 이내 공시해야 한다’는 이른바 ‘5%룰’을 지키지 않은 점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2004년 2월 금융당국이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입은 적대적 M&A를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판단을 내렸고, 그해 3월 KCC가 경영권 포기 선언을 하면서 현 회장이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됐다.
KCC와의 분쟁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현 회장은 또 다시 여론에 대한 지지 호소를 무기로 들고 나온 듯하다. 지난 11월 25일 현대그룹은 프랑스 예치금 1조 2000억 원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현대차그룹을 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했다. 현대그룹 측은 최근 현대건설 인수자금 의혹과 관련한 모든 소문의 출처를 현대차그룹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 많은 실탄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인수전에서 패한 현대차그룹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대그룹에 대한 허위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논리다.
현대그룹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직전까지 현대차그룹을 빗댄 TV·신문 광고를 통해 여론몰이를 했다. 먼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든 고 정몽헌 회장이 과거 현대건설 회생을 위해 거액의 사재를 출연했다는 내용에 이어 과거 현대건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현대차그룹이 외면했다는 내용을 광고로 내보냈다. 이후 ‘현대건설을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현대건설을 비상장 회사와 합병하지 않겠습니다’라며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 추진에 불순한 목적이 있다는 식의 광고를 내보냈다.
이런 현대그룹의 ‘현대차 깎아내리기’ 홍보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면서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가 되는 데 한몫을 했다는 평가가 제법 있다. 이와 맞물려 재계 일각에선 현 회장의 현대차에 대한 법적대응 결정 배경에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패한 정몽구 회장이 몽니를 부린다’는 식의 여론 조성 목적이 깔린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 막판 독일계 M+W그룹의 투자 철회 소식으로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전망이 불투명해졌을 때 “현 회장이 국민 정서에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 기자회견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향후 정몽구 회장과의 갈등 국면에서 현 회장이 충분히 꺼내들 만한 카드로 거론된다.
현대건설 인수전 동안 현대그룹 내에선 “현대가의 맏형인 정몽구 회장과 골이 깊어져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의식한 듯 지난 11월 18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의 정주영-정몽헌 부자 선영을 찾은 현 회장은 “정몽구 회장을 존경하고 집안의 정통성은 그분에게 있다”며 현대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 밝혔다. 현대차에 대해 법적 공세를 취한 현 회장이 향후 현대건설 인수자금 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와 또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도 주목된다.
앞으로 현대건설 내 ‘반 현정은’ 세력을 끌어안는 일 또한 중요해 보인다. 인수전 기간 동안 현대건설 내에선 현대차그룹의 인수를 기정사실화하고 현대차에 줄서기를 했던 임원들이 제법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대건설의 자산 매각 혹은 현대 계열사 지분을 현대건설에 팔아 인수자금을 조달할 것이란 관측 역시 현대건설 조직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현대건설 경영진의 유임 의사를 밝힌 현 회장의 현대건설 조직 끌어안기 과정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여러 논란을 딛고 현대건설을 품으려는 현 회장에게 지난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이후로 중단된 대북사업 재개 역시 당면과제일 것이다. 그동안 자금 동원 능력을 의심받아온 현대그룹이 줄곧 현대건설 인수 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던 배경엔 현 회장의 굳은 의지 외에도 대북사업의 상징성이 깔려 있었다. 현대그룹이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승계를 주장할 수 있는 건 대북사업을 계승한 덕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 정 명예회장 창업의 토대가 된 현대건설 인수의 당위성을 내세워왔기도 하다.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전까진 이재오 특임장관의 대북특사설이 흘러나오는 등 남북관계 호전 가능성이 비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이 승리할 거란 예상을 뒤집고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가 되면서 향후 대북관계를 고려한 정부가 현대그룹의 손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일각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1월 23일 북측의 연평도 포격 이후로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대북사업 재개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태다.
현 회장은 평소 다른 여성 경영인들과 비교되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오너일가 보호하에 경영활동을 펼치는 그들과 가시밭길을 거치며 역량을 드러내온 자신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현 회장이 최근엔 대우건설을 인수했다가 위기를 겪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오너일가와 비교선상에 올라 있으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해 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를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차가운 편이다. 현대건설 인수전 과정에서 두산그룹 오너 4세 경영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이 자신의 트위터에 “현대그룹은 TV 광고 할 돈으로 입찰금액이나 높이지…”란 글을 올려 눈길을 끈 바 있다.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따낸 이후 현대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현대건설 인수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결국 ‘돈 없는 현대그룹이 돈 많은 현대차그룹을 돈으로 이겼다’는 것이 현 회장에게 자랑거리가 아닌 극복해야 할 논란거리로 남은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현대건설 인수’ 어부지리 노린다고?
지난 11월 23일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은 ‘최대주주가 현대중공업 외 1인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외 14인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을 공시했다. 정몽준 의원(사진)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의 최대주주가 된 지 4년 7개월 만에 현정은 회장 계열사가 최대주주 자리를 되찾아온 것이다.
지난 2006년 4월 기습적으로 현대상선 지분을 매수했던 현대중공업 측은 당시 “최대고객인 현대상선의 적대적 M&A 위험성이 높아져 고객 확보와 투자 차원에서 지분을 매입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당시 현 회장은 “시커먼 옷을 입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백기사라고 하면 누가 믿겠느냐”라며 강력 반발한 바 있다.
이후 현정은 회장 측은 케이프포춘 등 해외 우호자본의 지분 투자를 늘리면서 현대상선 경영권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물론 KCC 역시 현대상선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언제든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으로 평가받아왔다. 현대상선은 현대증권 현대아산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어 현대상선이 넘어갈 경우 그룹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지난 11월 22일 현대중공업은 보유하고 있던 현대상선 상환우선주 중 일부인 175만 8344주를 상환해 소각했다고 공시했다. 이를 통해 전체 주식 수에서 현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계열이 앞서게 돼 최대주주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소각한 주식은 의결권과 상관없는 우선주였다. 결국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에 대한 영향력엔 전혀 변화가 없는 셈이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자금 조달과 현대상선 지배력 강화 등을 위해 현대상선 유상증자를 추진 중인 가운데 대주주인 현대중공업의 참여 여부가 관심을 끈다. 현대중공업 내부에선 “우리가 왜 현대그룹의 인수자금을 대줘야 하느냐”며 유상증자 참여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팽배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현대상선 지분율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참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직후 증권가에선 현대중공업 계열의 하이투자증권이 현대그룹의 자금 조달 논란과 관련된 정보를 꼼꼼하게 수집해 분석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때 현대건설 인수에 관심을 가졌던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 동향을 주시하는 것에 대해 재계와 증권가에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만약 현대그룹이 인수자금 조달에 실패할 경우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에 다음 우선협상대상자 순서가 갈 수 있다.
그런데 현대차에겐 ‘이미 한 번 패한 기업’이란 낙인이 찍혀있는 만큼 어부지리로 현대건설 인수 주도권을 현대중공업이 쥘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현대건설 관련 질문에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전혀 관심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재계에선 상황 변화에 따라 현대중공업의 현대건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질 수도 있을 거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