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이 창간된 1992년 대한민국 최초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쇼트트랙 레전드 김기훈을 만났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그는 울산대학교 강단에 서고 있다. 사진=김상래 기자
이에 앞서 1992년 2월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제16회 동계올림픽은 대한민국의 올림픽 도전사에 중요한 기점으로 남았다. 이 대회에서 사상 최초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 쇼트트랙 남자 1000m와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기훈 현 울산과학대 교수를 만났다.
김기훈 교수는 그의 메달 획득 이후로도 대한민국이 숱한 메달을 따낸 쇼트트랙 종목에서 ‘1세대’로 불린다. 그는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엔 쇼트트랙이 올림픽 종목에 선정되지 않았을 때다.
“1985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전까지 공부와 스피드 스케이팅을 병행하는 생활을 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봄, 여름, 가을엔 공부만 했고 겨울에만 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쇼트트랙 종목에서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렸고 주변에 권유로 참가했다가 얼떨결에 국가대표가 됐다.”
이전까지 생각지 못했던 종목이었지만 김기훈 교수와 쇼트트랙은 궁합이 좋았다. 체격이 크지 않던 그에게 비교적 작은 트랙에서 펼쳐지는 쇼트트랙이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시절에는 장거리(5000m 또는 1만m) 선수였다. 단거리에서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는 것보다 지구력이 좋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스케이팅을 잘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아이스하키 쪽 제안을 받기도 했다. 고3 때도 주변 권유로 선발전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어찌보면 그렇게 운명적으로 쇼트트랙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꼬마 시절부터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달렸던 그의 후배들과 달리 김기훈 교수는 국가대표가 됐지만 그가 따라갈 발자취가 없었다. 쇼트트랙은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야 정식종목이 됐고 1988 캘거리동계올림픽에서는 시범종목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기훈 교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성인이 되면서 쇼트트랙 종목도 올림픽에서 자리를 잡았다. 1992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
“당시엔 지금만큼 널리 알려진 종목이 아니었지만 국내 빙상계에선 쇼트트랙의 가능성을 봤다. 단 둘이 나서서 기록을 경쟁하는 스피드 스케이팅과 달리 여러 명이 좁은 트랙에서 경쟁하는 쇼트트랙이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특유의 박진감이 있지 않나. 그래서 빙상연맹도 믿음을 가지고 투자를 했고 나도 빠르게 실력이 늘어갔다.”
김기훈 교수는 “끊임없이 연구하는 성향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올림픽 금메달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
김기훈 교수의 이름 뒤에는 ‘현대 쇼트트랙의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외발 주법, 호리병 주법, 날 내밀기, 개구리 장갑(손끝에 에폭시 소재를 덧댄 장갑) 등은 모두 김 교수가 현역 시절 처음 선보인 것들이다. 그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면서도 “그땐 초기였기에 그런 기술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몸에 벨트를 묶고 코너를 도는 연습을 하는 지상훈련 방법이나 스케이트 날을 코너 안쪽으로 휘어지게 하는 것 등 지금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기술들이 많다. 초기엔 해외에서 기술을 들여왔지만 그 이후 우리나라가 쇼트트랙을 선도해 나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화제를 모았던 ‘날 내밀기’에 대해서는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그런 자세를 취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알베르빌올림픽 당시 개인 종목에서 이미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는 계주 종목에 마지막 주자로 나서 경쟁국에 뒤처졌지만 마지막 순간 발을 내밀며 결승점을 통과, 0.04초 차이로 2관왕을 달성했다.
김기훈 교수는 “나는 순발력에 강점이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다른 기술들은 오랜 연구 끝에 개발했지만 발을 내밀던 순간은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면서 “그 이후로도 많은 후배들이 그런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나. 끝까지 이겨보려는 승부욕에서 나온 장면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특히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기훈 교수만의 기술 개발은 끊임없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는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살던 시절, 휴가를 받아서 집에 가서도 개인 훈련을 했다. 그때 롯데월드 링크가 가까우니 그곳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다”면서 “원심력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였는데 롯데월드에 가니 스케이트를 타는 꼬마 아이가 코너에서는 한 발로 속도를 이어나가더라.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외발 주법이 탄생했다. 카레이싱이나 모터사이클 경주를 보면서도 힌트를 얻었고 실제 카레이서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92년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최초 메달리스트가 된 김기훈 교수는 또 한 번의 올림픽에 나서 1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커리어에 추가했다. 그는 “그동안을 돌아보면 많은 행운이 따랐는데, 두 번째 올림픽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올림픽 개최 주기가 4년인 것과 달리 1992 알베르빌올림픽 이후 2년 뒤인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올림픽이 다시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같은 해에 열리던 동·하계 올림픽의 주기를 다르게 하기 위해서다.
“운동 선수에게 4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신체에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고 그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선수생활 기간에 2년 만에 다시 올림픽이 열렸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하계올림픽을 2년 앞당길 수도 있었는데 동계올림픽을 당기는 선택을 했다. 나로선 감사한 일이었다(웃음).”
릴레함메르올림픽 이후에는 잠시 내려놓았던 공부와 다시 가까워졌다. 그는 선수촌 생활 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박사학위까지 따냈다.
“이론적인 부분까지 채울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과거엔 관습적인 부분에 의존하는 지도자가 많았다. ‘계란 먹으면 알깐다. 바나나, 미역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말을 했고 실제 그런 음식을 못먹게 했다. 사실은 식품영양학적으로 선수들에게 굉장히 좋은 음식이다. 내가 지도자가 돼서 선수들이 먹고 싶어 하길래 허락해주니 좋아하더라(웃음).”
최근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주 4회 농구 연습을 하고 있지만 김기훈 교수는 “결국 내가 설 곳은 빙판”이라며 웃었다. 사진=김상래 기자
그는 최근 방송가 나들이에 나서고 있다. 인기 예능 ‘뭉쳐야쏜다’ 팀에 합류해 각 종목의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농구에 매진하고 있다. 비교적 차분한 성격을 소유한 ‘교수님’인 그가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에 나섰을까.
“아들이 전 시즌인 ‘뭉쳐야찬다’ 시절부터 그 프로그램의 굉장한 팬이었다. ‘아빠는 왜 저런데 안 나가냐’고 재촉하더라. 섭외가 와야 나가는 건데(웃음). 그런데 마침 시즌이 바뀌고 종목이 바뀌면서 연락이 왔다.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당연히 해야지’라며 성화를 내더라. 본업(강의)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 스케줄이기에 출연을 결심했다. 이전에도 종종 방송 섭외가 오긴 했는데 울산에서 생활하는 내가 참여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김기훈 교수가 쇼트트랙이 아닌 다른 종목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농구공을 진지하게 만져보는 탓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는 “이전까지 쇼트트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피했다. 가끔 축구를 하더라도 나에게 공이 오면 멀리 차버렸다(웃음). 손목이나 발목을 다치면 안되니까. 이제 와서 농구를 시작하려니 어렵다. 이젠 아저씨가 돼서 뛰는 것조차 어색하더라”라며 웃었다.
그가 해오던 쇼트트랙과 농구의 괴리감은 생각보다 컸다. 그는 “물론 쇼트트랙도 경기 중에 상대방과 몸싸움도 펼치기에 공격성이 필요한 종목이다. 하지만 공격성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앞쪽에서 경기를 펼치며 코스 경쟁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10년 선수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실격을 당한 적이 없다”면서 “그런데 농구는 그렇지가 않더라. 격렬한 몸싸움이 끊이지 않고 때로는 반칙도 필요하다. 그런 부분이 나에게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그런지 허재 감독님이 ‘너는 어떻게 농구하면서 반칙 한 번을 안 하냐’고 타박하시더라”라며 웃었다.
뭉쳐야쏜다 팀에서 ‘벤치멤버’로 활약 중이지만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 중이다. 그는 “녹화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는 금요일을 제외하면 주중 4일은 매일 나가서 농구 연습을 한다”고 귀띔했다. “한 번에 잘해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딱히 낙관적인 성격은 아닌데 농구에 관해서는 낙관적이게 된다”며 웃었다.
최근 농구로 ‘외도’를 하고 있지만 항상 마음 한가운데에는 쇼트트랙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본업은 교수다. 링크가 있는 학교이기에 학생들에게 꾸준히 스케이팅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엔 울산과학대 팀을 만들었다”며 “그간 해왔듯이 쇼트트랙 저변 확대 등을 위해 일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빙판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울산=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