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한국 화장품 브랜드 홍보행사인 ‘2019 케이-뷰티’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다. 사진=연합뉴스
고 임광정 회장은 1962년 한국화장품을, 1989년에는 한불화장품(현 잇츠한불)을 설립했다. 시장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회사를 새로 세웠다고 밝히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승계를 염두에 두고 한불화장품을 설립했을 것이란 추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 1992년부터 장남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이 한국화장품을, 차남·삼남인 고 임현철 한불화장품 부회장과 임병철 잇츠한불 회장이 한불화장품 경영을 맡았다.
한국화장품이 고전하는 것과 달리 잇츠한불은 아모레퍼시픽이나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에 비하면 더디지만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다. 한때는 한국화장품처럼 위태롭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시의적절한 인수합병(M&A) 등으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임병철 회장 자녀 둘을 시험대에 올려 경영 능력을 평가하려는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연히 터진 달팽이크림 대박…신의 한 수 된 네오팜 인수
삼남 임병철 회장이 처음 대표이사에 올랐던 1992년만 해도 잇츠한불의 매출은 270억 원에 그쳤다. 하지만 매해 빠른 속도로 매출을 늘리더니 4년 만인 1996년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신규 설립한 회사이다 보니 임직원 평균 연령이 20대 중후반으로 낮았는데 빠른 의사 결정과 젊은층에 특화된 마케팅이 통했다는 평가다. 한불화장품은 1997년쯤부터 이미 형의 회사인 한국화장품은 제쳤다.
2020년 5월 잇츠한불이 명동에 오픈한 멀티 브랜드숍 ‘잇츠스킨’. 사진=잇츠한불 제공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잇츠한불 또한 2010년대 중반까지 계속 1000억 원대 매출을 맴돌았다. 한국화장품처럼 수시로 적자 전환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업계에서 존재감은 미미했다. 아버지 때는 라이벌이었던 아모레퍼시픽이 내수는 물론 중국시장을 장악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정체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처음 대표이사에 올랐던 1997년 6906억 원의 매출을 거뒀지만 2010년에는 2조 원대 매출을 돌파했다.
잇츠한불이 반전의 계기를 찾은 것은 2014년 즈음이다. 2006년 설립한 로드숍 잇츠스킨이 2011년 224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가 2012년과 2013년 각각 318억 원, 524억 원을 찍더니 2014년에는 단숨에 2419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 급증의 이유는 달팽이크림 판매량이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달팽이크림이 잘 팔리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시 잇츠스킨 한 관계자는 “달팽이크림이 잘 팔리는 이유를 알아내는 데 두 달이 걸렸다”며 “당시 중국 보따리상(따이공)들이 진열하기 무섭게 제품을 쓸어갔는데 배경을 알아보니 유명한 왕훙(網紅·중국의 파워 블로거나 인기 방송 진행자)이 달팽이크림을 극찬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달팽이크림은 동물성 원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위생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공식적인 수출길은 막혀 있다. 이 때문에 따이공 채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이공들은 혹시나 제재를 받게 될까 두려워 쉬쉬했다는 후문이다. 잇츠스킨이 판매 급증의 배경을 알아내는 데 애를 먹었던 이유다.
잇츠한불의 저력은 당시 운 좋게 터진 ‘달팽이크림 대박’을 사업 다각화의 기회로 썼다는 데 있다. 잇츠한불은 달팽이크림 덕에 번 돈으로 애경그룹으로부터 피부미용에 특화된 화장품 제조업체 네오팜을 인수했다. 네오팜은 애경그룹 계열사지만 안용찬 애경그룹 당시 부회장(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사위)과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 등이 지분을 가지고 있던 회사다. 애경그룹이 네오팜을 매각하게 된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잇츠한불이 727억 원에 인수한 네오팜은 어느새 그룹의 든든한 효자가 됐다. 대표 브랜드 아토팜을 중국시장에 진출시킬 계획인데 하나금융투자는 네오팜이 올해 매출 951억 원, 영업이익 253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때 매출이 3000억 원이 넘었던 잇츠한불은 지난해 다시 1000억 원대로 떨어졌다. 영업이익 또한 37억 원에 그쳤다. 화장품 유통업계 관계자는 “잇츠스킨과 한불화장품이 달팽이크림 특수만 즐겼더라면 지금쯤 다시 위기가 왔을 것”이라며 “네오팜은 아토피 등 민감피부 스킨케어 시장을 꽉 잡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그룹의 대표 계열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남·막내딸 경영 능력 시험대 올라
잇츠한불은 승계도 착실히 진행 중이다. 네오팜은 지난 3월 말 진행된 주주총회에서 임병철 회장의 막내딸 임우재 씨가 사내이사로 선임됐다고 밝혔다. 1987년생인 임 이사는 잇츠한불 마케팅실에서 일하다 네오팜에 합류했다. 올해 네오팜이 중국시장 공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인 만큼 마케팅 관련 업무를 맡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우재 이사는 막내딸이지만 경영 능력을 인정받으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첫째 임진홍 씨는 잇츠한불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고, 둘째 임진성 채화 대표는 경영 능력에 물음표가 붙어 있다. 임진성 대표는 2018년 잇츠한불의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이네이처를 분할해 세운 이네이처코리아 대표를 맡았는데 이네이처코리아의 매출은 수십억 원에 그치다가 2020년 5월 청산됐다. 임진성 대표는 두 달 뒤 신규 설립한 채화의 대표이사를 새로 맡게 됐고, 여기서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승계구도에서 앞서나갈 수 있다는 평가다.
잇츠한불의 변수는 임병철 회장의 형인 고 임현철 회장의 장남 임진범 씨다. 임진범 씨도 아직 잇츠한불에 합류하지는 않았으나 지분이 15.73%에 달한다. 누나인 임효재 씨 지분도 3.40%에 달해 임병철 회장 입장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잇츠한불은 임 회장이 35.2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자녀 3명은 각각 0.24%의 지분만 들고 있다. 잇츠한불은 공식적으로는 경영 승계를 검토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지분 승계 방안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잇츠한불 관계자는 “2020년 1월만 해도 전망이 괜찮았지만 코로나19 이후 관광객이 급감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며 “우리도 대응을 하려 했지만 화장품 사업 자체가 관광객에 많이 의존하다보니 좋지 않은 실적을 거뒀다”고 전했다. 승계와 관련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덧붙였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