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 신발은 그 형태에 따라 신목(신에서 발목이 닿는 윗부분)이 있는 장화 모양의 신인 ‘화’(靴)와 신목이 없는 신인 ‘혜’(鞋)로 구분된다. 혜 제작과정. 사진=문화재청 제공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신의 흔적은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 시대의 유적인 중국 심양시 정가와자 마을의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청동제 단추들이 달린 가죽 장화가 발견되어 그 이전부터 신발 문화가 발전해왔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 사람들이 발목이 짧은 형태의 가죽신인 ‘혁탑’을 신었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 ‘후한서’는 “마한 사람들이 짚신을 신었다”고 전한다. 역사학자들은 활발한 수렵 활동으로 많은 가죽이 생산됐던 한반도의 북방계 문화권에서는 가죽신이, 농경 생활로 짚이 풍부했던 남방계 문화권에서는 짚신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신은 대부분 목이 길거나 짧은 가죽신이다. 목이 긴 가죽신은 말을 탈 때 사용했고, 짧은 것은 평상시에 신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죽신은 오래 신을 수 있고 착용감이 좋아 백제, 신라에서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사용됐다. 고려 시대에는 관복 제도가 시행되면서 복장에 맞춘 신의 착용이 제도화됐다.
문무백관이 관복에 맞추어 신던 목화. 사진=문화재청 제공
조선 시대로 오면서 가죽신은 더욱 발전해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경국대전’에는 상의원과 공조 등 중앙관청에 화장 16명, 혜장 14명이 소속되어 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당시 신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과 품계에 따라 가죽신의 착용을 엄격히 규제했다. 예컨대 악공 중에서 7품 이하는 음악을 연주할 때 이외에는 가죽신 신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죽신은 편하고 내구성이 강해 일반인에게도 널리 선호되었고, 이를 제도로 규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죽으로 만드는 ‘갖신’은 갠 날 신는 ‘마른신’과 눈비 오는 궂은 날 신는 ‘진신’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신의 코와 뒤축에 무늬를 새긴 화려한 신발로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태사혜, 신코에 당초문을 수놓은 신으로 양반집 규수의 필수 혼수품이었던 당혜, 색실로 매화, 나비 등을 수놓아 아름답게 꾸민 신으로 젊은 부녀자가 주로 신었던 수혜(꽃신) 등이 대표적인 마른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진신은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가죽에 기름을 먹이고 바닥에 징을 박아 만든 것으로 유혜 또는 징신이라고도 했다.
태사혜와 운혜.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조선이 저물고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우리 전통 신발은 마지막 전성시대를 누렸다. 복식 규제가 사라지자 가죽신에 대한 서민들의 수요가 한때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고무신이 신발 시장을 점령하고 뒤이어 구두가 널리 퍼지면서 전통 신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71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실 갖바치로 불리던 황한갑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화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전통 신을 되살릴 전기가 마련되는 듯했다. 그러나 1982년 그가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면서 갖바치의 명맥은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 후 20여 년 만에 전통 신의 맥을 다시 이은 주인공은 황한갑의 손자인 황해봉이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기술에 옛 문헌과 복식학자들의 도움을 더해 전통 화혜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화혜장은 2004년 새롭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황해봉은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 신의 복원과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황해봉 보유자가 신골로 신의 모양을 잡는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황해봉 화혜장 보유자는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 맞추어 가는 게 우리 전통 신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신의 좌우 구별이 안 되는 듯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발 모양이 나서 제 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는 이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신, 그게 바로 우리 전통 화혜가 아닐까 생각된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