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심판 성격이 강한 야당 압승 선거 결과에 검찰이 원칙대로 수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2018년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이진석 대통령국정상황실장 등 3명도 같은 날인 9일 불구속 기소했다. 차기 검찰총장 임명 전에 조남관 대검찰청 차장(검찰총장 권한대행)이 묵혀 있던 예민한 정치인 관련 사건 처리에 속도를 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검찰 입장에서 여전히 예민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사건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총장 선임을 신중하게 더 고민할 것’이라고 얘기한 것은 그 사이 이성윤 지검장 사건 처리를 원하는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거 이틀 뒤인 4월 9일 검찰은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국회의원(사진)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횡령), 업무상 횡령, 정당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사진=박은숙 기자
#정치사건 속도전
전주지검 형사3부는 4월 9일 이스타항공 횡령·배임 사건의 핵심이자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의원은 2017년 이스타항공의 장기차입금을 조기에 상환, 회사의 재정 안정성을 해치는 등 회사와 직원에 수백억 원의 금전적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의 달라진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상직 의원의 의혹들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딸이 몰던 고급 외제차에 회사 돈이 쓰인 정황도 드러났다. 법조계에 따르면 전주지검은 이스타항공 계열사인 이스타홀딩스의 자금 1억 1000만 원이 이 의원의 딸이 타던 포르셰에 사용된 의혹도 수사 중이다. 검찰은 수백억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이스타항공 자금 담당 임원이 이 의원의 지시로 이 돈을 지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밖에 검찰은 30억 원 이상의 돈이 현금으로 인출된 정황을 추적 중이다. 검찰은 자금 중 일부가 이 의원 가족들을 위해 사용되거나 선거 등에 활용됐을 가능성을 확인 중이다.
사실 검찰은 이미 선거 전부터 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했다. 횡령 의혹 금액이 수백억 원 수준으로 큰 점도 있지만, 이스타항공이 최근 근로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등 자금난을 겪는 상황에서 오너의 횡령은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던 이 의원은 관련 의혹이 불거진 직후 탈당했는데 검찰은 이 의원이 탈당한 후 소환조사 등을 본격화했고, 재보궐선거 이틀 후인 9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회 체포 동의가 있어야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열릴 수 있는 상황에서 선거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려 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검찰의 신중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야당의 압승, 정부에 대한 심판적 성격이 강했던 선거 결과를 지켜본 뒤 사건을 처리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민심을 수사 흐름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도 “선거 다음날이 아니라 이틀 뒤에 영장을 청구한 것은, 수사팀-대검찰청의 보고 및 승인이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하루를 확보한 것으로 이는 이미 ‘준비를 했다’는 정치권의 비판을 피하기 위함도 있다”고 귀띔했다.
국회는 임시국회가 시작되는 19일이나 본회의가 열리는 29일에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할지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에서 완패한 여권이, 한때 동료였던 이 의원을 지켜주기 위해 불체포 특권을 강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검찰은 이 밖에도 묵혀왔던 여권 관련 사건들을 선거 이후 기다렸다는 듯 처리하고 있다. 같은 날인 9일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부장 권상대)가 이진석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송병기 전 울산시 경제부시장 등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겼다. 이 실장은 송철호 당시 울산시장 후보와 경쟁 관계였던 김기현 전 울산시장(국민의힘 의원)의 핵심 공약인 산업재해모병원 예비타당성 조사 발표를 늦춘 과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검찰의 기소 후 “검찰 주장대로 청와대가 개입한 사건이라면 당시 비서관이었던 이진석이 무슨 권한으로 그 일의 책임자일 수가 있겠냐”고 반발했지만, 검찰은 청와대 이진석 실장이 사건에 개입했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부장 권상대)가 4월 9일 이진석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사진)을 불구속 기소했다. 사진=연합뉴스
#대검 고민 ‘이성윤 사건’ 처리 방향
검찰이 쩔쩔 매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금 의혹 사건’이다. 수사 주체인 수원지검은 대검찰청에 ‘이 지검장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거듭 보고했다. 하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인 조남관 대검 차장검사는 이 지검장 기소 여부를 고심 중이다. 이 지검장이 차기 검찰총장 유력 후보군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4월 12일 차기 총장을 뽑는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추천위) 회의 일정과 관련해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 당장 계획하는 건 없다”고 말했다. 또 “공백 상태를 신속히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 잘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검찰 안팎에서는 “이성윤 지검장 무혐의를 원하는 박범계 장관의 희망사항이 담긴 것 아니겠냐”는 관측이 나온다.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꼽히는 이 지검장을 수원지검이 기소할 경우, 차기 총장에서 이 지검장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검찰총장이 피고인이 돼 검찰과 혐의를 놓고 다퉈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검장이 재판에서 유죄를 받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법원 관계자는 “이 지검장을 한 차례도 소환조사하지 못하고, 진술이나 정황 증거만으로 기소를 했다가는 불법 출금 개입 과정에 대해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도 있다”며 “무죄가 나올 경우 검찰이 정권과 가깝다는 이유로 억지로 기소했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어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검찰청 관계자 역시 “선거 결과에 따라 차기 총장 유력 후보군이 바뀔 것이라는 얘기는 선거 전부터 돌았는데, 선거 이후 이성윤 지검장이 조금 더 유력해지는 것 같다”며 “역시 총장 후보군인 조남관 권한대행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