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 전쟁’에서 합의하면서 SK이노베이션이 합의금 2조 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사진=박정훈 기자
SK이노가 LG엔솔에 주기로 한 합의금은 총 2조 원이다.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보상 규모 중 역대 최대 금액이다. SK이노가 지난해 배터리 사업 부문에서 올린 매출(1조 6102억 원)보다 많다. SK이노는 현금과 로열티로 나눠 지급한다. 현금 1조 원은 올해와 내년에 걸쳐 5000억 원씩 분할해서 주고, 나머지 1조 원은 2023년부터 매년 SK이노 배터리 매출의 1~1.75%를 로열티로 누적 1조 원이 될 때까지 지급한다.
로열티 1조 원에 대한 부담은 큰 편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급 시점이 SK이노의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배터리 공장 가동 계획과 맞물려 있다. 이번 합의로 SK이노는 국제무역위원회(ITC)의 미국 내 10년 수입 금지 명령 조치가 취소돼 조지아주 공장을 예정대로 가동할 수 있다. SK이노는 현재 9.8GWh 규모의 배터리 제1공장을 완공해 시험 가동하고 있다. 2023년 초 가동을 목표로 11.7GWh 규모의 제2공장을 짓고 있다. 1공장은 2022년 1분기부터 가동을 시작해 폴크스바겐에 파우치형 배터리 공급을 시작한다. 2공장에서 생산될 배터리는 포드에 공급된다.
다만 현금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SK이노는 주력 사업인 정유 부문이 지난해 영업손실 2조 5688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 영업이익이 흑자 전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코로나19 전인 2019년, 2018년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배터리 사업은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 1조 원을 돌파했지만 아직까지는 적자 사업이다. 손익분기점 달성 시점은 올해, 흑자 전환은 내년으로 목표를 잡았다.
대규모 투자는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배터리와 배터리 분리막 공장 신·증설에 4조 7822억 원을 투입했다. 앞으로 2조 9135억 원을 더 투자할 계획이다. 배터리와 배터리 소재사업 중심으로 세계 주요 거점에 대한 추가 투자도 예정돼 있다.
곳간에 쌓아둔 현금도 활용하기 어렵다. 지난해 말 기준 SK이노가 가진 현금은 3059억 원(개별기준)이다. 단기금융상품, 단기대여금, 매출채권, 미수금 등을 전부 끌어와 합치면 현금은 6000억 원대고, 전체 유동자산은 약 1조 7000억 원이다. 그러나 재고자산(약 3400억 원)이 전체의 20%다. 거래가 언제 끝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매각예정자산은 6440억 원대다. 이를 모두 고려하면 실질 유동성은 40% 정도다. 여기에 1년 안에 갚아야 할 유동부채 규모가 1조 4700억 원에 달한다. 총차입금은 2조 2153억 원, 순차입금은 1조 8974억 원이다. 당장 쓸 수 있는 대규모 현금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지난해 말 국내 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SK이노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한국기업평가는 신용등급은 내리지 않았지만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대규모 영업적자와 투자, LG엔솔과 소송으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최근 합의로 사업적으로는 위험 요인이 사라져 긍정적이지만, 합의금을 분할해 지급하더라도 규모 측면에선 재무부담이 크다고 보고 있다.
현재 SK이노는 합의금 지급을 위한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식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SK이노 안팎에선 100% 자회사 SK루브리컨츠 일부 지분과 페루 광구 매각 등으로 재원을 마련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관련 작업이 계획대로 순항할지 먼저 지켜봐야 한다. SK루브리컨츠 지분 매각은 사모펀드와 협상 단계에 있고, 지난해 매각이 결정된 광구는 현재 페루 정부의 승인이 미뤄지고 있다.
상장을 추진하고 있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에 관심이 쏠린다. SKIET의 폴란드 공장 건설현장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SKIET 기업가치는 9조 원대로 평가받고 있다. SK이노의 시가총액(20조 원)의 절반 수준이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3조 원대로 평가됐지만 해외 공장 증설 등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등의 방식으로 8개월 만에 기업가치를 3배로 끌어 올렸다.
9조 원대의 기업가치를 만들기 위해 설비 투자 비용을 제외하고 영업가치를 계산하는 상각전영업이익(EBITDA) 방식을 적용했다. 비교기업은 에코프로비엠, 일진머티리얼즈, 포스코케미칼, 천보, 중국 창신신소재 등이다. SKIET는 이들의 기업가치를 상각전영업이익으로 나눈 EV/EBITDA 평균 48.1배를 적용해 기업가치를 약 9조 4000억 원으로 산정했다. 주가수익비율(PER)로 환산하면 지난해 당기순익(907억 원)의 100배에 달한다. 일각에선 2차 전지 관련 업종의 평균(70~80배)에 비해 과도한 수준이라며 ‘고평가’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SK이노는 SKIET 공모 준비 단계에서 지분 희석은 최대한 줄이고 구주 매출 규모를 늘리는 데 총력을 다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SKIET의 지분 90%를 가진 SK이노는 이번 공모에서 보유 지분 22.7%(1283만 4000주)를 매각한다. 구주 매출 규모로는 삼성생명 이후 역대 최대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를 두고 SKIET 상장이 SK이노의 합의금 조달 창구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SKIET의 1주당 희망 공모가 범위는 7만 8000~10만 5000원이다. SK이노는 지분 매각 규모를 희망 공모가 범위 최저금액인 1주당 7만 8000원으로 산정, 1조 10억 5200만 원이라고 지난 3월 말 공시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공모밴드가 기준으로 계산하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1조 원의 자금 유입은 확정적”이라며 “다만 현재 SK이노의 재무상황과 투자계획 등을 볼 때 합의금 재원으로 얼마나 활용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SK이노 관계자는 “SKIET 상장 이후 유입될 자금은 당초 계획대로 사용될 것”이라며 “올해 사업 실적이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합의금도 향후 수 년 동안 분할 지급하기로 한 만큼 재무부담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