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는 오는 4월 30일 상호출자제한기업 및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자산총액 5조 원 이상 기업은 공시대상기업집단, 10조 원 이상은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된다. 올해에는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쿠팡이 자산 5조 원을 넘어서며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기업은 공정거래법에 따라 주식소유현황 등을 투명하게 신고해야 하며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일감몰아주기) 등 여러 규제를 받는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시대상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더 명확하고 또렷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진은 지난해 3월 6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를 찾은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왼쪽)이 김범석 쿠팡 의장(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런 이유에서 일부 기업은 동일인 지정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공정위는 2017년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보유한 지분이 4.64%로 비교적 적지만 사실상 네이버를 지배한다고 판단해 동일인으로 지정했지만, 이해진 GIO는 이를 꺼렸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계열사에 대한 내부거래를 공개하고 규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진 GIO는 네이버를 동일인이 없는 기업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해진 GIO와 마찬가지로 김범석 의장도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김범석 의장은 쿠팡의 지분 10.2%를 보유하고 있으며, 1주당 29표의 의결권을 갖는 차등의결권을 적용하면 76.6%의 의결권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정위의 공시대상기업집단 동일인 가운데 외국인은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쿠팡의 동일인은 김범석 의장이 아닌 법인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물론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회사는 이미 흔하다. 에스오일과 케이티 등 9개 기업도 자연인이 아닌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들은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거나 외국계 회사들로 쿠팡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김범석 의장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은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김범석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공정위가 선례를 만들면 되는 일”이라며 “롯데그룹의 동일인인 신동빈 회장도 일본 국적을 취득해서 외국인이 되면 동일인이 아닌 게 되겠나. 만약 쿠팡의 동일인을 법인으로 지정하면 향후 다른 기업들의 편법이 난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동일인 지정 기준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회에서 나왔다. 사진은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이종현 기자
당시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호흡곤란 및 심근경색 증상으로 쓰러진 뒤 줄곧 병원 신세를 졌고 경영권은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이 갖고 있었다. 신격호 총괄회장도 96세 고령과 건강상 문제로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공정위는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고정해두고 있었다. 공정위는 이듬해인 2018년 5월이 돼서야 삼성의 동일인을 이재용 부회장으로, 롯데의 동일인을 신동빈 회장으로 변경했다.
문제는 공정거래법이 동일인의 지정 기준을 또렷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업집단이란 동일인이 지배하는 회사를 의미한다’고 설명할 뿐 동일인의 국적이나 경영 능력 상실 여부 등 자격에 대한 내용은 없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한 여당 의원은 “총수가 사망하거나 경영이 어려운 상황이 될 때마다 동일인 변경과 지정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한번 손 볼 필요가 있다”며 “김범석 의장의 지배 영향력을 생각하면 동일인이 돼야 마땅하지만 ‘사실상 지배력’이라는 모호한 공정위의 기준에 빈틈이 존재한다. 논의를 더 거쳐 법을 개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