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통업체들이 4월부터 최저가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진=연합뉴스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커머스에 이어 대형마트까지 국내 유통업체들이 4월부터 최저가 행사에 뛰어들었다. 그 시작은 쿠팡이다. 쿠팡은 4월 초 유료 멤버십 가입 없이도 로켓배송 상품에 대해 무료배송해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쿠팡에서 기존 로켓배송 무료배송을 이용하기 위해선 월 회비 2900원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최저가 검색을 해도 배송비가 추가되면 구매 금액이 올라간다는 소비자 불만이 잇따르자 이 같은 캠페인을 마련했다.
이마트는 14년 전 카드를 꺼냈다. 최저가 보상제다. 이마트는 지난 8일 쿠팡·롯데마트몰·홈플러스몰과 비교해 최저가 상품이 아닐 경우 차액을 ‘e머니’로 돌려주겠다고 밝혔다. e머니는 이마트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이마트앱 전용 쇼핑 포인트다.
다른 유통업체들도 잇따라 프로모션을 내놨다. 마켓컬리는 지난 12일 ‘컬리 장바구니 필수템’ 전용관을 열고 EDLP(Every Day Low Price) 제도를 시행한다고 전했다. 채소·과일·수산·정육·유제품·쌀·김 등 60여 가지 식품을 1년 내내 온라인몰 최저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롯데마트는 지난 15일부터 이마트가 내놓은 500개 생필품 최저가 보상제에 맞서 해당 상품의 가격을 이마트몰에서 제시하는 가격으로 판매한다. 이에 더해 해당 상품을 쿠폰 전용 애플리케이션인 ‘롯데마트 GO’를 이용해 결제할 경우 엘포인트를 기존 적립률보다 5배 더 적립해주기로 했다.
홈플러스만 유통업체들이 선택한 최저가 보상제 대신 자신들의 무기인 ‘신선식품 무상 A/S 제도’에 신경 쓰겠다고 했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가격 경쟁에 참여하기보다 신선상품 무상 A/S제도를 강화해서 우리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형 유통업체의 최저가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마트는 1997년부터 최저가 보상제를 운용했으나 업체별 가격 차이가 줄고 출혈경쟁의 원인이 된다며 2007년 폐지했다. 이후 이마트는 2010년 1월 12개 품목에 대한 가격 인하를 발표했고, 롯데마트가 경쟁사보다 10원이라도 더 저렴하게 판매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며 최저가 전쟁이 시작됐다. 이를 지켜본 업계는 국내 대형 유통업체들을 향해 “무모한 출혈경쟁”이라며 혹평했다.
이번에도 최저가 보상제로 승부를 보겠다는 대형 유통업체들은 “과거 성과 없는 싸움과 다르다”며 “이번 대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붕괴된 소비심리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는 것”이라고 평한다. 이마트 관계자는 최저가 보상제에 대해 “가격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커머스에 이어 대형마트까지 국내 유통업체들이 4월부터 최저가 행사에 뛰어들었다. 사진=EDLP(Every Day Low Price) 제도 시행을 밝힌 마켓컬리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빼앗긴 고객을 되찾기 위해 진행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온라인, 편의점 등 유통업계가 다양화되면서 고객들의 이용률이 낮아지자 이를 다시 끌어 모으겠다는 것.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마진 없는 장사를 다시 시작하는 건 누가 쓰러질지 보자는 것”이라며 “손님 확보 전쟁”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 찾기’에 나선 대형 유통업체들 움직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은 또 있다. 납품업체와 도매상인들이다. 특히 납품업체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최저가 전쟁을 치르던 시절 단가 인하 압박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한 대형마트 식품 납품업체 관계자는 “(과거 최저가 보상제를 이행하던 때) 무료로 물량을 지급하거나 단가를 내려달라는 압박을 해온 경우가 있다”며 “결국 피해 보는 건 우리 같은 납품업체”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모든 상품을 최저가로 낮추면 납품업체 불만이 커질 수 있지만 주로 대기업들에서 만든 제품으로 진행돼 납품업체에 피해가 갈 일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대기업 제품을 중심으로 시작된 최저가 보상제가 장기간 이어질 경우 하위 납품업체들에도 계약 체결로 인한 압박이 전가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일부 납품업체가 대형 유통업체 마케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 따르면 국내 한 생활잡화 납품업체가 대형 유통업체와 상품공급계약을 체결하고 물건을 납품했는데 계약기간 중 유통업체 측에서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별도 광고 서비스 비용을 부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유통업체 측은 당시 “광고 서비스에 대한 내용을 사전에 구두로 설명했다”고 밝혔다.
국내 유통구조로 따져봤을 때 납품업체들은 대형 유통업체 마케팅에 의견을 피력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갑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 납품업체는 대형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와 거래를 희망하지만 납품 경쟁이 치열해 쉽게 물품을 납품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에 납품업체는 대형 유통업체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한다.
익명을 요구한 정육 납품업체 관계자는 “(계약에 대해 언급하기가) 솔직히 조심스럽다”며 “최근 최저가 행사에 대한 압박은 아직 없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납품업체가) 대형 유통업체 눈치 보고 납품하는 건 비일비재하다”고 귀띔했다.
도매상, 즉 대리점들도 노심초사한다. 대형마트에 납품하지 않는 대리점과 같은 중간상인은 대형 유통업체보다 높은 금액으로 동네 상권에 물건을 납품할 수밖에 없기 때문. 두유, 우유, 두부 등 식료품 기업은 대형마트와 동네 상권(슈퍼 및 개인마트) 거래를 개별로 진행한다. 대형마트의 경우 기업에서 곧바로 납품하지만 동네 상권의 경우 2차 중간 상인인 대리점을 두고 납품한다. 이때 기업은 대형마트 측에 물품을 더 저렴하게 푼다. ‘판매량을 높이겠다’는 대형마트 압박에 기업 측에선 대리점에 내놓는 물품보다 더 저렴하게 내줄 수밖에 없는 것.
서울 광진구에서 식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김 아무개 씨(51)는 “기업에선 대형마트에 할인행사를 더 많이 걸어준다”면서 “(대형마트의 최저가 보상제는) 상인들을 더 죽이는 꼴”이라고 토로했다.
업계는 최저가 전쟁이 현 시기에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가장 저렴하면서 좋은 상품을 내준다는 마케팅은 칭찬할 만하지만 유통의 트렌드가 변한 이 시점 10~20원 차이로 업계를 뒤흔드는 게 옳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한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프라이스 워(Price War, 가격경쟁)는 경기 불황 또는 최악의 유통 거래 상황에서 꺼내드는 마지막 카드”라며 “모든 유통업체들의 피해도 막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