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작노리개(왼쪽부터 산호노리개, 밀화불수노리개, 백옥쌍나비노리개).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
“그 옛날 내가 아주 작은 아가씨였을 때 나의 저고리에는 조그마한 천도(天桃) 노리개 한쌍이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외할머니가 주신 것으로 우리 어머니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어머니 가슴에 채워주신 것이었다 한다.…(중략) 먼 훗날 내 딸아이가 시집을 가면 거기에 그 옛날의 향낭 대신 신식 향수를 뿌려서 물려주리라. 그리고 그 속에 외할머니와 우리 어머니의 많이도 고달팠던 세월이며 한(恨)이며,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인내, 나의 설움을 조금 묻혀서 물려주리라. 우리나라 여인의 대표적인 장신구의 하나인 노리개는 이렇듯 단순히 장신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에게서 여인으로 물려 내려지는 하나의 소중한 여인정신사의 상징이었다고나 할까.”
시인의 노래처럼, 노리개는 단순히 패물이나 골동품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딸의 딸로 물려 내려지는 혼(魂)이며 한(恨)이며, 사상사(思想史)였다. 곱고 예쁜 여인의 옷섶을 생각하며, 주체(主體: 주된 장식물), 띳돈(맨 윗부분 장식품), 주체를 걸고 있는 매듭(每絹)과 장식 술(流蘇: 여러 가닥의 실) 만들기에 매달렸을 장인의 숨결이 담겨 있었다. 노리개는 또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오늘날 값비싼 보석이나, 화려한 장신구에 밀려 사라져가지만, 그 속에는 범접하지 못할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노리개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신라의 요패(腰佩: 허리에 차는 신분을 나타내는 패)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고려시대의 여성들이 허리에 찬, 금방울과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 향 주머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왕족이나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도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 허리에 패용했다. 궁중가례 때 주인공인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혹은 공주, 옹주 또는 이날 참석하는 귀부인들이 몸에 찼다. 평민은, 혼삿날 신부가 시부모 앞에 폐백드릴 때에 찼다. 다홍치마와 노란휘장저고리에 당저고리를 입은 신부는 삼작(三作: 하나를 찼을 때는 단작(單作)노리개, 세 개를 동시에 찼을 때는 삼작(三作)노리개라고 부른다)노리개를 찼고, 혼인잔치에 참가하는 새색시들도 패용했다. 5월 단오에는 흰저고리 흰적삼 흰당저고리로 갈아입고 옥(玉)노리개 또는 비취옥노리개, 옥장도 등 한 개짜리 노리개를 찼다. 8월 보름이면 색저고리 색당저고리를 입고, 각색 삼작노리개를 차고 이에 맞는 가락지를 끼었다.
▲ 향집노리개. |
노리개 재료로는 은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은도금(銀鍍金)이나 백동(白銅)도 사용했다. 보패(寶貝)류 중에는 비취·산호·호박·진주·옥을 애용했으며, 비단에 곱게 수(繡)를 놓아 향(香)주머니나 괴불(어린아이가 주머니 끈 끝에 차는 세모 모양의 조그만 노리개)을 만들고 여기에 매듭과 술을 더해 노리개 삼아 차기도 했다.
매듭은 주체의 위·아래에서 주체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주로 사용된 매듭은 도래매듭, 생쪽매듭, 나비매듭, 국화매듭, 장고매듭, 병아리매듭 등이었다. 술은 봉술, 딸기술, 낙지발술(끈술)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끈목은 띳돈, 주체, 매듭, 술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띳돈은 노리개를 걸 때 사용하는 걸개장식으로 보면 된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려왔던, 그래서 딸의 딸에게 물려줄, 여성의 혼(魂)을 담은 노리개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고단한 세상살이에서도 참고, 일구며, 물려줄 지혜의 노리개, 그 노리개가 사라져간다.
-용어풀이
도래매듭: 두 줄을 어긋매껴서 두 층으로 맺은 매듭. 매듭과 매듭을 연결하거나 다른 매듭의 가닥이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하거나, 끝마무리를 할 때 이용된다.
생쪽매듭: 생강 쪽처럼 생긴 매듭. 석씨매듭, 장구매듭 따위의 기초가 되며, 삼작노리개, 부채 끈 따위에 쓰인다.
봉술: 술(여러 가닥의 실)의 하나. 머리 부분에 종이나 실, 헝겊, 쇳조각 따위로 원기둥꼴로 동인 술이다.
딸기술: 머리 부분에 종이나 나무 따위를 받쳐 딸기의 윗부분같이 도도록하게 만든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