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목소리와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지닌 배우 엄태구는 그 이미지 뒤에 수줍음과 섬세함을 숨기고 있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박훈정 감독님과 누아르를 해보고 싶었어요. 모든 작품을 인상 깊게 봤지만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건 ‘신세계’의 충격과 ‘마녀’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낙원의 밤’은 제게 정말 특별하고 새로웠던 게, 정통 누아르의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재연’이라는 캐릭터가 들어오면서 새로움과 신선함이 가미됐던 점 때문이었어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색의 누아르인 것 같아서, 그리고 박훈정 감독님과 작품을 해 보고 싶었기에 너무 욕심이 났었죠.”
그런 엄태구가 선택한 작품은 4월 9일 넷플릭스로 전 세계 동시 공개된 영화 ‘낙원의 밤’이었다. ‘누아르 특화 감독’이라는 별칭이 붙은 박훈정 감독의 6번째 작품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엄태구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박태구 역을 맡았다.
박태구는 자신의 누나와 조카를 살해한 라이벌 조직 북성파의 보스에게 복수한 대가로 조직의 타깃이 된 인물이다. 세력 싸움으로 인한 갈등과 시한부 삶을 사는 누나에 대한 걱정으로 거칠고 날 선 내면의 모습이 외면으로까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태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위해 엄태구는 촬영 전 9kg 정도를 증량했다고 했다.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에서 자신의 이름과 같은 태구 역을 맡은 엄태구는 연기를 위해 9kg 가량을 증량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제주도로 무대를 옮기면서 태구는 자신의 누나처럼 시한부 삶을 사는 재연(전여빈 분)을 만나게 된다. 러시아 마피아 조직 출신의 총기 밀거래상 삼촌과 함께 지내는 재연은 감정의 기복이 적고 냉소적인 인물로, 삼촌의 영향을 받아 능수능란하게 총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치병에 걸린 냉정한 천재 여성 총잡이’라는 다소 과한 설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코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데에는 전여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괴물 같은 연기력이 한몫했다는 것이 엄태구의 이야기다.
“전여빈 배우의 전작 ‘죄 많은 소녀’를 두고 ‘연기 괴물’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연기를 했기에 그러나 싶어서 영화를 봤는데 정말 연기 괴물이더라고요. 첫 촬영을 같이 할 때 일단 총을 쏘는 장면이 가장 크게 기억에 남아요. 굳이 지르거나 드러내지 않고도 무표정만으로 서늘함과 아픔, 그런 것들이 전달되는 정말 좋은 배우였어요.”
전여빈이 엄태구와 함께한 파트너로서의 좋은 상대역이었다면, 태구의 대척점에 선 마 이사 역의 차승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좋은 상대였다. 라이벌 조직의 실질적 1인자인 마 이사는 잔인하고 다혈질적이면서도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깔끔한 거래(?) 방식으로 박훈정 식 악역의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캐릭터다. 그런 마 이사를 완벽하게 완성해 낸 차승원에 대한 이야기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엄태구는 데뷔 15년 차를 맞이할 동안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멜로 장르에 욕심을 보이기도 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상대를 치켜세우고 자신은 내려앉히는 겸손한 말을 이어갔지만 엄태구도 데뷔 15년 차의 잔뼈가 굵은 배우다. 그의 독특한 저음과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과 더불어 어떤 캐릭터를 맡든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연기력에 대중들은 잔잔한 호응을 보내왔다. 그런 엄태구의 연기 철학은 “매순간 진실 되게 임하는 것”이라고 했다.
“저는 일단 준비를 철저히 해요. 그런데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저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보니 현장에 가면 준비했던 게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고 ‘내가 대체 뭘 준비 한 거지?’ 하는 경험들을 할 때가 있어요(웃음). 반면 준비했던 게 오롯이 기억으로, 내 몸에 드러나는 순간들도 있고 이게 할 때마다 왔다갔다 하더라고요. 뭔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럴 때가 가끔 있어요. 이 캐릭터로 오로지 진짜로서, 가만히 있는 장면이라도 스스로 그곳에 ‘진짜’로 존재했다는 생각이 들면 굉장히 뿌듯하고 보람되고, 또 좋아요.”
그러면서 아직까지 해보지 못한 장르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상하기 조금은 어렵지만 캐스팅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일단 대중들의 관심은 반드시 집중될 장르, ‘멜로’였다.
“제가 가진 멜로의 강점은 잘 모르겠지만 멜로 연기 하고 싶어요(웃음). 멜로가 주가 되는 그런 작품의 연기는 아직 한 번도 못 해봤거든요. 로맨스 비슷한 건 독립영화에서 해 봤는데 정통 멜로의 느낌으로 작품이 들어온다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