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수 9단의 68세 우승은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서도 최초다. 서 9단으로서는 지난 2003년 돌씨앗배 우승 이후 18년 만의 우승이기도 하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지난 14일 경기도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단판승부로 열린 제8기 대주배 남녀프로시니어최강자전 결승에서 서봉수 9단이 유창혁 9단을 상대로 233수 만에 흑으로 2집반승을 거두고 우승컵의 주인공이 됐다. 서봉수 9단의 대주배 우승은 처음. 또한 68세 우승은 국내는 물론 세계 최고령 우승 기록이다.
만 50세 이상 남자 프로기사와 만 30세 이상 여자 프로기사들이 경쟁을 벌이는 대주배는 매 회 새로운 사연들이 탄생하며 화제를 모은 기전이었다. 올해는 어떤 사연이 나올지 궁금했는데, 세 번째 결승진출 만에 우승컵을 안은 서봉수 9단이 주인공이었다.
1953년생인 서봉수와 1966년생인 유창혁의 나이 차는 열세 살. 둘 간의 전적은 41승 28패로 유창혁이 앞서고 있다. 통산 타이틀은 서봉수 29개, 유창혁 27개. 세계대회 우승은 서봉수가 제2회 응씨배 우승밖에 없는 반면 유창혁은 후지쯔배, 응씨배, 삼성화재배, 춘란배, LG배 등 그랜드슬램(2002년 당시 기준)을 달성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둘은 닮은 점도 많다. 조-서 시대라고는 했지만 서봉수는 조훈현에 가려 평생 2인자의 설움을 겪었다. 유창혁의 바둑은 화려하고 공격적이었으나 이창호라는 희대의 천재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었다. 두 사람이 타이틀전에서 왜 이렇게 만나지 못 했었나 잠시 궁금했는데 이들의 전성기가 조훈현-이창호 사제의 전성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대국 전 인터뷰에서 유창혁은 서봉수를 두고 “조심성이 많은 선배 기사”라고 했고, 서봉수는 “유창혁과의 속기전에서 별로 이겨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한번 이겨보고 싶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1999년 열렸던 유창혁(왼쪽)과 서봉수의 LG정유배 결승3국 종국 후 모습. 서봉수가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승리, 우승컵을 안았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두 레전드 간의 타이틀매치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21년 5개월 전인 1999년 11월 제4기 LG정유배(현 GS칼텍스배의 전신) 결승5번기. 당시는 풀세트 접전 끝에 서봉수가 3-2로 승리, 우승컵을 안았다.
유창혁이 김미리 4단, 권효진 7단, 김혜민 9단 등 여자 기사들을 꺾고 올라온 데 반해 서봉수는 강다정 2단, 권갑용 9단, 김영환 9단을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서봉수의 흑47까지는 인공지능의 다음 한 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47수까지 인공지능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 덕분에 인공지능의 승부예측은 67.2% vs 32.8%로 흑을 든 서봉수가 앞서고 있음을 나타냈다.
서봉수의 연구열은 유명하다. 인공지능 이전에는 한국기원 4층 국가대표 연구실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젊은 기사들이 피곤해 할 정도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최근엔 인공지능으로 공부하는 눈치다. 한때 인공지능을 활용해 강의하는 유튜브도 개설했지만 요즘은 뜸하다.
장면도1
#장면도1
먼저 ‘장면도1’을 본다. 침착하게 국면을 이끌던 서봉수가 백의 중앙 젖힘에 돌연 흑1로 끼우면서 사단이 일어났다. 흑1에는 서봉수의 보이지 않는 기대가 담겨 있었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일방적인 수읽기. 백의 다음 반격이 날카로웠다.
장면도1-1
#장면도1-1
흑1의 끼움에 상변 백 두 점을 구출하려면 백은 2로 몰고 4로 이어야 한다. 그러면 흑5를 선수한 후 7로 젖히겠다는 것이 서봉수의 계산. 이 그림은 백이 연결에만 급급했을 뿐 흑의 자세가 너무 좋다.
장면도1-2
#장면도1-2
흑1에 백2로 단수치자 서봉수 9단이 입맛을 다신다. 생각에 없던 반격이고 흑의 달콤한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린 수. 흑3·5의 끊음은 내친걸음이지만 7까지 품에 넣은 백 넉 점도 뒷맛이 남아 있어 영 개운치 않다. 그뿐이면 좋으련만 백8이 예리한 메스와도 같은 수. 좌변 흑도 엷어져서 흑은 일거에 비세에 빠져버렸다.
제한시간 10분의 초속기 대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상변 전투 일합에서 흑과 백의 처지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젠 흑이 쫓아가야 할 차례다.
장면도2
#장면도2
차이를 더 벌릴 수 있었지만 우상에서 유창혁의 실수가 나오는 바람에 차이가 조금 좁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흑은 쫓아가기 버거운 상태. 흑1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지켜두고 하변 흑 모양을 부풀려 추격에 나서는 게 흑의 마지막 희망이다. 흑1로 백2를 차지하고 싶지만 백에게 흑1 쪽을 당하면 낙이 없다. 자, 이제 백은 2로 확실하게 좌변을 접수하면 되는데….
장면도2-1
#장면도2-1
백1·3은 손바람이 지나쳤다. 아무 득이 없는 수. 상변 흑을 가둬봤자 백 6점이 잡혀 있기 때문에 수가 되지 않는다. 반면 흑2·4로 좌변을 뚫은 것이 컸다. 여기서 인공지능의 승부예측은 다시 5 대 5가 됐다.
장면도2-2
#장면도2-2
당했다고 생각하자 유창혁의 승부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백1 끊음도 욕심. 이후 백11까지 백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반해 흑은 8과 9의 교환, 10, 12 등 연속으로 포인트를 올리고 있다.
유창혁 9단(왼쪽)과 서봉수 9단의 통산전적은 서 9단 기준으로 29승 41패가 됐지만, 타이틀전에서는 서 9단이 2전 전승으로 앞서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68세, 세계 최고령 우승, 통산 서른 번째 타이틀 획득, 18년 만의 타이틀 추가 등 서봉수 9단에겐 잊지 못할 승부가 됐을 레전드 매치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초반에 망한 바둑이었다. 유창혁 9단이 쉽게 두면 됐는데 손해를 엄청 많이 봤다. 좌변에서 아래 위를 전부 끝내기 할 수 있어서 유리해졌다고 봤다. 응원해주셔서 고맙다”는 서봉수 9단의 인터뷰가 있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