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의 새로운 컨트롤타워 미래전략실장으로 임명된 김순택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1월 24일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열린 사장단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
지난 3일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를 통해 사장 자리에 오른 이재용-이부진 남매 못지않게 새로운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맡은 김순택 부회장이 재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번 인사를 통해 구조조정본부(구조본)와 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이 ‘문책 인사’ 꼬리표를 달고 전보 발령을 받으면서 새로운 삼성을 열어젖힐 조타수로 김 부회장이 주목받는 것이다. 지난 2008년 4·22 삼성 쇄신안 이후 2년 8개월 만에 부활한 새 컨트롤타워의 수장이 된 김 부회장이 걸어온 길을 통해 ‘이학수 시대’와 결별에 나선 삼성그룹의 향후를 가늠해 본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이번 사장단 인사에 앞서 ‘젊은 조직’을 강조하며 60대 노신들의 대거 퇴진을 예고했다. 이미 지난해 정기인사 때부터 시작된 60대 임원 물갈이 행렬 속에서 김순택 부회장은 홀로 살아남다시피 했다. 지난해 인사에서 60대 임원들이 대거 옷을 벗는 가운데 1949년생 동갑내기인 김순택 당시 삼성SDI 사장이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 부회장으로, 최도석 당시 삼성카드 사장이 부회장으로 각각 승진하며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최도석 부회장이 사표를 냈고 인사를 통해 그나마 남아있던 60대 인사들이 대부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런 와중에 전략기획실을 계승한 미래전략실의 수장을 맡게 된 김순택 부회장은 1950년생인 강호문 중국삼성 신임 부회장과 더불어 그룹 내에서 ‘유이’하게 잘나가는 60대가 된 셈이다.
김 부회장은 전략기획실 전신인 회장 비서실에서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타고난 비서’로 불렸을 만큼 이건희 회장의 눈도장을 일찍부터 받은 인물이다. 경북고와 경북대를 졸업하고 1972년 삼성그룹 계열 제일합섬에 입사한 김 부회장은 1978년 회장비서실 감사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감사팀장에 오르면서 감사 대상 직원들 사이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는 소릴 곧잘 들었다. 어떤 직원이 거래처에서 와이셔츠 티켓 하나 받았다는 이유로 경질되면서 이를 적발했던 김 부회장을 향해 “냉혹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당시 회의석상에서 계열사 고위 임원들에 기죽지 않고 핵심을 짚어내 조목조목 역설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너무 쌀쌀맞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 덕분에 이 회장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취임 4년째였던 지난 1991년부터 1년간 이 회장을 수행하는 비서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김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그의 비서 경력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룹 내 ‘영원한 2인자’로 군림해온 이학수 고문이 회장 비서실과 구조본·전략기획실을 거치며 줄곧 이건희 회장 곁을 보좌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순택 부회장은 여러 계열사를 거치며 현장 경험을 쌓은 까닭에서다. 지난 1993년 비서실에서 삼성전관 기획관리본부장으로 옮긴 뒤 이듬해 회장 비서실장 보좌역으로 돌아왔다가 1997년 다시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문 대표이사로 나가게 됐다. 그리고 1999년 삼성SDI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겨 10년 간 삼성SDI를 이끌었다.
이학수 고문이 재무통이라면 김순택 부회장은 전형적인 기획통이다. 김 부회장이 비서실뿐만 아니라 그룹 주력 계열사를 두루 거칠 수 있었던 배경엔 이 회장으로부터 인정받은 그만의 남다른 기획력이 깔려 있었다는 평가다. 김 부회장은 회장 비서실 감사팀에서 1986년 운영팀으로 보직 변경을 통해 신사업 개척 업무와 인연을 맺었다. 비서실 운영팀은 당시 그룹의 신수종 사업이었던 반도체 사업에 대한 그룹 차원의 기획과 지원을 총괄하던 곳이다. 그룹의 미래 살림을 설계하는 능력을 이때부터 갈고 닦은 셈이다.
삼성SDI 대표이사 시절엔 그의 신사업 개척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5년부터 삼성SDI 주력 업종이던 브라운관 TV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김 부회장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삼성SDI를 2차전지로 대표되는 에너지 중심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이후 삼성SDI는 독일 보쉬와의 합작사인 SB리모티브를 통해 지난해 8월 독일 BMW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급권을 획득한 데 이어 지난 11월엔 미국 크라이슬러와도 납품 계약을 맺었다. 삼성SDI가 2차전지 분야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삼성SDI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이뤄낸 김 부회장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직에 오르면서 12년 만에 사실상 이건희 회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지난해 인사에 앞서 이 회장은 “10년 후 어떻게 먹고 살지가 걱정”이라며 신성장 동력에 대한 우려를 자주 표현했다. 그런 이 회장이 그룹을 장차 먹여 살릴 신사업 발굴팀 수장으로 김 부회장을 택했다. 그리고 김 부회장에 대한 이 회장의 두터운 신뢰는 이번 인사를 통해 미래전략실장 발탁으로 구체화됐다.
▲ 2006년 당시 김순택 삼성SDI 사장(가운데)이 이건희 회장과 함께 일본 요코하마 평판디스플레이 전시회를 참관하는 모습. 연합뉴스 |
미래전략실장으로 임명된 직후인 11월 24일 김 부회장은 삼성 사장단협의회에 처음 참석해 “이 회장이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다가올 변화를 직시해 미래에 대비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김 부회장이 이 회장의 무한 신뢰를 등에 업고 있음을 알리는 자리였던 셈이다.
이 회장이 김 부회장에 중책을 맡긴 배경엔 비서실 경험과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로서의 검증된 능력 외에도 현장에서 빛을 발했던 탁월한 소통 능력이 깔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9년 김 부회장이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이 됐을 때 직원들은 그의 서슬 퍼렇던 감사팀 시절 소문에 잔뜩 위축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단시간 내에 임원은 물론, 평사원들 누구나 김 부회장을 찾아와 보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회의석상에서도 일단 자신이 말을 하기에 앞서 직원들의 말을 꼼꼼히 들었다. 아무리 길게 발언해도 중간에 끊는 법이 없었다. 대신 두서없이 장황한 내용일지라도 다 듣고 나서 핵심 내용을 요약해주고 간결한 보고 방법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삼성SDI 사장 시절 간부 승진자들과 찜질방 간담회를 열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서류나 필기도구 없이 찜질방 복장으로 승진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경직된 사무실에서 벗어나 편한 차림으로 직원들과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도 강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밖에 김 부회장은 해외 출장 중에도 경사를 맞은 직원들에게 현지에서 직접 축하카드를 보내는 등 직원들과의 소통에 공을 많이 들였다.
김 부회장은 신입사원 환영회 때마다 “여러분도 언젠가 CEO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입사원 누구든 CEO가 될 잠재력이 있으며 CEO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일일이 그들 부모에게 “자녀들을 인재로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저와 회사가 잘 키우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한다. 임원들에게도 “사람 귀한 줄 알고 대하라”고 당부했다. 김 부회장은 강압적 자세 대신 원활한 소통으로 직원들을 이끌면서 ‘덕장’이란 별칭을 얻게 됐다.
이렇듯 여러 분야에서 남다른 감각을 발휘해온 김 부회장에게 이건희 회장이 바라는 것은 그룹조직의 안정 및 신수종 사업 개발과 더불어 경영권 승계 발판 마련일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60대 인사들을 대거 정리한 이 회장은 향후 ‘이재용 체제’ 구축을 위한 신흥세력 약진에 주력할 것으로 보이는데 미래전략실이 이 작업의 중심에 설 전망이다. 구조본·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고문은 이 회장에 대한 보좌와 이재용 사장으로의 승계 인프라 구축, 그리고 그룹조직 관리와 인사를 두루 살피는 팔방미인의 면모를 보였다.
이학수 고문과는 대조적인 환경에서 성장해온 김 부회장이 ‘제2의 이학수’ 역할을 잘 해낼지에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다. 다만 재벌가 경영권 승계과정을 재무통들이 주도해온 전례를 볼 때 경영권 승계 문제에선 기획통인 김 부회장보다 재무통으로 성장해온 이상훈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 사장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박스 기사 참조).
이건희 회장이 ‘이학수 시대’와의 단절을 위해 이학수 고문 계열이 아니면서 그와 전혀 다른 업무적 배경을 지닌 김순택 부회장을 발탁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이 회장이 역설한 ‘젊은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60대의 김 부회장이 이재용 사장 승계에 필요한 과도기를 잠시 이끈 뒤 조만간 이상훈 사장 같은 신진세력에 바통을 물려줄 것이라는 때 이른 관측도 제기된다.
삼성SDI 사장이던 지난 2008년 9월 김 부회장은 직원들 앞에서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산양처럼 일하라. 사냥개는 목숨 걸고 달리는 산양을 결코 잡지 못한다”고 말했다. 회장 비서실 발령을 받고 감사팀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1년 중 절반을 집에 들어가지 못해 김 부회장 부인이 이웃으로부터 첩살이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김 부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우직하게 달려온 그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학수 고문이 보여줬던 화려한 행보와는 달리 묵묵함과 성실함으로 지금 자리까지 오른 김 부회장이 ‘이학수 시대’를 성공적으로 청산하는 주역이 될지에 재계의 뜨거운 시선이 향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경영권 승계는 재무통 몫?
지난 3일 삼성의 새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구성이 발표되면서 실장을 맡은 김순택 부회장 못지않게 전략1팀장을 맡은 이상훈 사장이 재계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미래전략실은 김순택 실장 밑에 전략1팀과 2팀, 경영지원팀, 커뮤니케이션팀, 인사지원팀, 경영진단팀 등 총 6개 팀으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전자 계열사를 담당하는 전략1팀을 이끌게 된 이상훈 사장이 새로운 실세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훈 사장은 김순택 부회장의 경북고-경북대 경제학과 후배다. 사적으로는 김 부회장과 인연이 깊지만 업무적으로는 이학수 고문과 더 가까운 편이다. 지난 1982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상훈 사장은 북미총괄경영지원팀 임원 등을 거쳐 2005년 구조본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이후 구조본을 이어받은 전략기획실의 부사장을 지내며 구조본·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고문 밑에서 그룹 재무를 총괄했던 김인주 전 사장(현 삼성카드 고문)의 뒤를 이을 재무통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상훈 사장은 지난해 말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최지성 부회장(CEO), 윤주화 사장(CFO·경영지원실장)과 함께 ‘이재용 시대’를 이끌어갈 신흥 트로이카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가 이번 인사를 통해 미래전략실 주축이 되면서 지난 10년여 동안 구조본·전략기획실 실세로 활약해온 이학수-김인주-최광해 재무통 3인방의 공백을 대체할 것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상훈 사장이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사장과 가깝다는 점도 그의 향후 역할을 더욱 주목받게 하는 대목이다. 이상훈 사장은 1999년 2월부터 2002년 1월까지 삼성전자 북미총괄 경영지원팀장으로 일했는데 당시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이재용 사장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룹 내 최대 파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학수-김인주 재무라인 계보를 계승하는 동시에 이재용 사장과도 돈독한 이상훈 사장이 김순택 부회장에 버금가는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난 2008년 5월 윤종용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퇴진 이후 이윤우 부회장이 새 대표이사에 앉았지만 이재용 사장의 신뢰를 받는 최지성 사장(현 부회장)이 실권을 행사했던 점과 비교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이상훈 사장이 이학수-김인주 라인 인사들을 이재용 사장 측근세력으로 양성하는 역할에 나설 가능성을 눈여겨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