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초선의원들이 4월 9일 오후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4·7 재보궐 선거 참패 후 정가에선 당헌까지 바꿔가며 공천을 밀어붙였던 여권 주류 친문계 입지가 좁아질 것이란 예상이 주를 이뤘다. 실제 일부 초선과 비주류 중진들은 친문계를 향해 포문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미풍에 그쳤다. 친문 진영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 강성 지지층 등을 앞세워 전열을 재정비했다. 당 곳곳에서 고개를 들었던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도 빠르게 진압됐다.
친문계의 세는 원내대표 선거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 들어 당 사무총장과 법사위원장을 맡으며 핵심 친문 인사로 꼽히는 윤호중 의원은 비주류 박완주 의원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5월 2일 전당대회를 앞두고도 당 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들은 앞 다퉈 친문에 구애하는 모습이다. 외부 여론과는 무관하게 당내 선거에서 친문 지지층을 끌어안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문 진영 정치 알람시계는 내년 3월 대선에 맞춰져 있다. 재보선에서의 일격을 만회하기 위해 일찌감치 정권 재창출 수립에 착수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대선 경선 연기론이다. 현재 민주당 당헌은 ‘대선 180일 전’ 후보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내년 대선이 3월 9일 치러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민주당은 늦어도 9월 초엔 후보를 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6월경 경선에 돌입해야 한다.
복수의 친문 인사들은 ‘경선이 9월쯤에나 가능하지 않겠느냐’라는 입장을 보였다. 한 친문 재선 의원은 “당헌 ‘180일 전’ 규정엔 단서가 있다. 상당한 사유가 있는 때엔 당무위 의결로 달리 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지금 코로나19가 대유행 기로에 서 있다. 코로나가 대선 경선을 연기할 상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굳이 당헌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친문 초선 의원도 “대선 경선은 정당의 최대 이벤트이자 축제인데, 이런 (코로나) 상황에서 제대로 치르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얘기는 올해 2월에도 나온 바 있다. 친문 핵심 전재수 의원은 2월 15일 MBN ‘백운기의 뉴스와이드’에 출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정돼 있던 정치 일정도, 흥행이나 더 좋은 대선 후보를 만들기 위해 시간표 조정을 충분히 논의해서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사실상 대선 경선을 늦추자는 발언인 셈이다.
당시 이재명 지사 측은 발끈했다. 코로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차기 선호도 1위’ 이재명 지사를 견제하기 위한 속내가 담겨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지사 지지를 선언한 민형배 의원은 “민주당은 코로나 와중에 그 어느 때보다 잡음 없는 총선을 치렀다. 불공정으로 오해받고 갈등 유발하는 그런 짓(대선 경선 연기) 못한다. 누구도 시도할 생각조차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낙연 지도부 등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일단락됐다.
재보선이 끝난 후 친문 핵심들은 여러 차례 회동을 갖고 대선 경선을 늦추자는 쪽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또 다른 친문 재선 의원은 “구체적인 시일은 정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추이를 보면서 경선 날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했다”면서 “경선을 관리하게 될 새로운 지도부의 판단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결정을 관철시킬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귀띔했다. 어떤 지도부가 들어서건 ‘실력행사’를 통해 대선 경선 연기를 밀어붙이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4월 20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청소·경비노동자 휴게시설 개선 국회토론회에서 참석자 소개를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친문계가 수면 아래에 있던 경선 연기 카드를 다시 꺼내든 이유 중 하나가 ‘오세훈 학습효과’라는 말도 나온다. 보수 야권 대선 레이스는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유사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국민의힘이 후보를 확정한 뒤, 윤석열 전 총장 등이 참여할 것으로 점쳐지는 신당과 단일화를 하는 방식이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국민의힘 경선을 거쳐 외곽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최종 경선을 치른 바 있다.
국민의힘 당헌은 대선 후보를 ‘선거 120일 전’까지 뽑도록 규정하고 있다. 11월 초다. 국민의힘이 신당과 단일화를 실시할 경우 보수 야권 차기 주자는 빨라야 12월 무렵 정해질 전망이다. 민주당 후보가 보수 야권 후보보다 ‘컨벤션 효과’ 측면에서 불리하고, 또 검증에 일찍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여권 내부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서울시장 선거 때도 ‘오세훈-안철수 단일화 이슈’는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정치권에선 친문계의 다른 노림수에 주목한다. 이재명 지사 독주체제로 흘러갈 조짐을 보이는 여권 차기 레이스의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속내가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친문계의 이른바 ‘3후보론 찾기’를 위한 시간벌기용이란 해석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일각에선 ‘친문 적자’로 꼽히는 김경수 경남지사의 최종심이 6월경으로 예상되는 것과 연관 짓기도 한다.
한 친문계 전직 의원은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대통령 힘은 빠진다. 국정 무게추는 차기 주자에게로 급격히 쏠린다. 차기 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문 대통령 마지막 임기가 좌우된다는 얘기”라면서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재명 지사는 부담스럽다. 친문계의 3후보 찾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경선 연기 논의가 ‘이재명 견제’ 차원일 수 있다는 세간의 시선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인가’다. 대선 경선 연기는 유력 주자인 이재명 지사 측의 강한 반발을 살 가능성이 높다. 친문과 이재명 지사 간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정가 일각에선 이낙연 전 대표가 경선 연기 화두를 띄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친문계를 끌어안는 동시에 이 지사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서다. 친문 진영에서도 “이 지사와 함께 유력 주자로 거론되는 이낙연 전 대표가 총대를 메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류가 감지된다.
앞서의 친문계 전직 의원은 “경선 연기가 이 지사에게 꼭 불리하다고 볼 순 없다. 보수 야권 상황까지를 종합해보면 이 지사 역시 경선을 좀 미루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지사는 강점 못지않게 약점도 많은 정치인이다. 일찍 후보가 될수록 야권의 공격에 더 많이 노출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 지사 측으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사석에서 “(친문계의) 억지이자 궤변”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문은) 코로나 핑계 대며 대선까지 미루자고 할 사람들이다. 재보선에서 나타난 여론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당헌 바꿔서 공천했다가 심판받은 것 아니냐. 그런데 또 유·불리에 따라 당헌을 바꿔 경선을 연기한다고? 국민은 물론 당원을 무시하는 처사다. 도대체 누가 그런 작당을 하고 있단 말이냐. 민심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친문도 이재명 지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를 거스르면 정권을 내주게 될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