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1년차 외국인 사령탑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미국과 다른 한국식 야구 불문율에 적응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 순간 수베로 감독과 한화 외국인 코치들이 더그아웃에서 크게 분노했다. 나성범이 정진호의 공을 적극적으로 타격하려 한 점을 문제 삼는 듯했다. 메이저리그는 ‘크게 이기고 있는 팀이 3볼-노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풀스윙 하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지고 있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위로 판단해서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용되는 불문율은 아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수베로 감독은 좀처럼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경기 후 야구팬들은 “수베로 감독이 상황을 지나치게 메이저리그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MLB식 불문율과 한국식 불문율 차이
다음 날 수베로 감독의 설명으로 ‘과한 분노’의 의문이 풀렸다. 앞서 한화도 NC로부터 다른 불문율을 어겼다는 지적을 받았기에 더욱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기 하루 전인 16일 수베로 감독은 한화가 1-9로 지고 있던 7회 초 1루 주자 임종찬에게 도루 사인을 냈다. 그러나 임종찬이 도루를 시도하자 NC 포수 양의지가 한화 더그아웃을 향해 어필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공수 교대 시간에는 한화 선수들에게 “도루를 하면 안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화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몇 년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7회 이후 7점 이상의 큰 점수 차에서는 이기고 있는 팀과 지고 있는 팀 모두 도루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수베로 감독의 의문이 발생했다. 크게 앞선 팀이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도루를 자제하는 건 미국과 한국 리그 모두 통용되는 불문율이다. 그러나 ‘지고 있는 팀도 도루를 하지 말라’는 내용은 오랜 야구팬들에게도 생소한 사항이다. 수베로 감독은 “어필 상황 후 (임시 주장인) 하주석이 와서 ‘한국 선수들이 예전에 그런 합의를 했다’고 알려주더라. 그래서 나도 ‘만약 그런 불문율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뛰게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결정을 한 건 감독의 실수이니 미안하다. 다른 선수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해 달라’는 얘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수베로 감독이 ‘지고 있는 팀의 도루 금지’ 배경을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다. 다만 KBO리그에 몸담고 있는 만큼 ‘한국 야구만의 합의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에서는 더 큰 금기로 여겨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미국에서 온 감독과 코치진의 당황스러움은 몇 배가 됐다.
수베로 감독은 그 후 좀 더 적극적으로 양쪽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다. “(도루 시도가 문제가 된 16일엔) 1루수가 뒤로 빠져 있었다. 야수가 주자 뒤로 물러나는 이유는 주자의 진루와 상관없이 수비 범위를 넓히고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때 주자가 움직이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또 나성범의 스윙 상황과 관련해선 “투수가 아닌 야수가 공을 던지고 있었다. 지고 있는 팀은 다음 베이스로 갈 수 없는데, 이기고 있는 팀은 야수가 던진 공에 (점수를 내려고) 스윙을 한다는 게 밸런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수베로 감독은 “불문율에도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는 팀이 안 된다면 이기는 팀도 안 되는 게 맞지 않나. 그날은 그 밸런스가 깨진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격하게 어필한 것”이라고 했다.
이해 여부와 ‘존중’은 별개 문제다. 수베로 감독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KBO리그 문화에 문제를 삼거나 ‘내 생각이 옳으니 바꾸자’는 게 아니다. 문화의 차이니까 내가 맞춰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동의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 존중하는 게 옳다”고 거듭 강조했다.
KBO리그에서는 어느덧 사구를 맞힌 투수가 타자에게 사과를 건네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사진=연합뉴스
#도루를 해도 되는 점수 차 기준은
미국의 한 야구 전문지는 수년 전 ‘선수가 지켜야 할 에티켓 10가지’를 정리한 적이 있다. 야구 규칙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불문율이다. ①상대에게 모욕적 행동을 하지 마라 ②점수차가 많이 났을 때 앞서는 팀에선 도루나 번트를 삼가라 ③홈런을 치고 너무 좋아하거나 베이스를 천천히 돌지 마라 ④포수의 사인을 훔치지 마라 ⑤삼진을 잡은 투수는 미친 듯이 기뻐하지 마라 ⑥투수가 노히트노런 같은 대기록을 세우고 있을 때는 기습번트를 대지 마라 ⑦도루할 때 스파이크를 높이 쳐들지 마라 ⑧타자의 머리 뒤로 공을 던지지 마라 ⑨홈런을 맞았다고 다음 타자부터 일부러 맞히지 마라 ⑩상대팀 슈퍼스타를 보호하라.
한국 야구에서 흔히 말하는 불문율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만 기준이 모호한 게 문제다. ‘모욕적인 행동’의 기준, ‘점수차가 많이 났을 때’ 기준 등은 각자 생각에 따라 크게 다르다. 특히 ‘큰 점수 차에서 도루 금지’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논란을 낳는 불문율이다.
2013년 5월 21일 잠실 두산 베어스-넥센 히어로즈전의 대립 상황이 대표적인 예다. 넥센이 12-4로 앞선 5회 초 1사 1·2루에서 당시 넥센 소속이던 2루주자 강정호가 3루 도루에 성공하면서 벤치 클리어링과 빈볼 시비로 이어졌다. 이 일을 두고 한 야구 관계자는 “보통 도루 시도를 하지 않는 마지노선을 5~6점으로 여기기 때문에 8점 차 도루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위가 맞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경기 후반이 아닌 5회였고, 10점 차도 뒤집는 게임이 숱하게 나오던 시기다. 넥센도 선발투수가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라 안심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해석했다.
201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4월 12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한화전에서 롯데 소속이던 황재균이 7-0으로 앞선 1회 말 2루 도루를 감행했다. 이 도루는 첫 회부터 대량 실점한 한화 선수들의 분노로 이어졌고, 투수 이동걸이 황재균의 다음 타석에서 몸에 공을 맞혀 역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이때도 의견은 갈렸다. 한 구단 운영팀 관계자는 “5~6점 차면 아무리 경기 초반이라도 굳이 도루나 번트로 상대팀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로야구 감독 출신인 한 야구인은 “모든 팀이 한 이닝 대량 득점을 할 수 있는 ‘타고투저’ 시대였다. 5회 이전에는 8~9점 차도 안심할 수 없다. 1회라면 더욱 그렇다”는 반론을 제시했다.
물론 보복성 빈볼의 불문율도 존재한다. ‘타자의 머리 쪽으로는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미국 야구 전문지가 추린 대표적 금기사항 중 하나다. ‘팀 혹은 동료를 위한 보복’보다 ‘동업자 정신’이 먼저라는 의미다. 또 공식적으로는 “내가 일부러 빈볼을 던졌다”고 말하는 투수도, “내가 빈볼을 지시했다”고 털어놓는 지도자도 없다. 보통 투수 조장이나 베테랑 투수가 후배에게 빈볼을 주문하는 일이 많지만 모두 “몸쪽 공을 던지려다 손에서 공이 빠졌다”고 입을 모은다. ‘빈볼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불문율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이렇게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양 팀이 같은 사안을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한 쪽은 “기만을 당했다”고 하고, 다른 쪽은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하니 판단은 야구팬의 몫이다.
#한국식 불문율이 된 ‘사구 후 사과’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 수베로 감독이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몇 개가 더 있다. 홈런을 친 타자가 방망이를 집어 던지며 화려한 세리머니를 하는 ‘배트 플립’, 그리고 일부 야구인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사구 후 사과’ 문화다.
몸에 맞는 볼은 야구에 몸쪽 승부가 존재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요소다. 다만 공에 맞은 선수가 심한 부상을 당했을 때는 몸과 마음에 엄청난 상흔이 남는다. 대부분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프로 투수의 빠른 공에 맞은 타자의 육체적 고통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최근 헤드샷을 맞고 안와골절 수술을 받은 두산 포수 박세혁처럼 부상 정도가 크다면 더 그렇다. 이런 경우 사구를 던진 투수들도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과 죄책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따라서 몇 년 전부터 KBO리그에선 ‘사구 후 사과’가 새로운 ‘한국식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10개 구단 감독자 회의에서 이와 관련한 논의가 진지하게 오가기도 했다. 한 감독은 “고의성이 없는 사구는 문제될 게 없지만, 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 아니냐”며 “서로 (사구 이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는 데 감독들이 합의했다”고 귀띔했다.
2019년 4월 4일 인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롯데전에서 벌어진 롯데 민병헌의 사구 상황은 달라진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당시 맹활약하던 민병헌이 SK 투수 박민호의 직구에 손가락을 맞아 골절상을 입자 SK는 이례적으로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구단 차원의 유감 표명을 했다. “민병헌 선수가 박민호 선수의 몸쪽 공에 맞아 부상을 당한 점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한다. 조속한 시일 내에 부상이 완치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박민호 선수가 경기 후 민병헌 선수에게 ‘몸에 맞는 공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게 해 죄송하다. 빨리 완쾌해서 건강하게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며 “SK 단장과 감독도 경기 후 롯데 단장과 감독에게 각각 구단 핵심전력의 손실에 대한 유감과 빠른 쾌유를 바라는 뜻을 전했다”는 상황 설명까지 덧붙였다.
반대로 열흘 뒤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 지붕 라이벌’ LG 트윈스-두산전에서는 LG 투수 배재준이 두산 외국인 타자 호세 페르난데스의 팔꿈치 보호대를 맞히고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가 비난 세례를 받았다. 공을 맞은 페르난데스가 베이스로 향하면서 한동안 마운드를 응시하자 배재준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맞섰기 때문이다. 일부 두산 선수들이 더그아웃 바로 앞까지 달려 나왔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경기 후 성난 두산팬들이 배재준의 개인 SNS를 찾아 항의 메시지를 쏟아냈고, 그는 “잘못을 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성숙해지겠다”는 사과문까지 남겼다.
그러자 한국식 ‘인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투수들까지 이 문화에 동참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삼성 라이온즈 외국인 투수였던 덱 맥과이어는 ‘배재준 사태’ 후 2주 만에 대구 LG전에서 상대 타자 유강남의 왼팔 보호대를 공으로 맞힌 뒤 모자를 벗고 두 손을 모은 다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LG팬들은 “한국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기특한 외국인 선수”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후 정작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선 설왕설래가 오갔다. “고의성도 없고 타자가 다친 것도 아닌 평범한 사구인데, 과도한 사과는 오히려 불필요한 것 같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투수 출신인 현역 감독은 “내가 현역 시절에는 타자를 맞히고 그런 사과를 해본 적이 없다. 그라운드에서는 서로 경쟁자 아닌가. 사구는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면 좋겠지만, 90도 인사까지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정 사과를 하고 싶다면 경기장 밖에서 하면 된다”는 의견을 냈다. 타자 출신인 또 다른 감독은 “인사를 하는 게 나쁜 문화는 아니지만, 인사를 안 하는 선수에게 ‘나쁜 선수’라고 낙인을 찍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특히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선수에게까지 ‘폴더 인사’를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고 했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선 사구가 경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모자를 벗고 사과하는 문화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KBO리그 지휘봉을 처음으로 잡은 맷 윌리엄스 감독도 같은 의견을 냈다. 하지만 “경기 중 사과의 뜻을 전하는 것도 한국식 문화이고 표현 방식의 하나이니 그냥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의견 역시 공통적이다. KBO리그에서 뛰면서 굳이 특유의 문화를 배척할 의사는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선배 타자에게는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후배 타자에게는 손만 들어 건성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일부 투수들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구의 고통과 그라운드 위 예의범절에는 이제 위아래가 없는 듯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