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자신이 일흔이 넘어서 세계 무대에 우뚝 서고, 102년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거라고 생각이나 해 봤을까. 여전히 “인생을 모른다”는 배우 윤여정(73)에게는 꿈의 오스카 무대도 ‘앞을 모르는 인생사’ 속 티끌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크고 빛나는 티끌.
26일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뉴스 속보를 지나가던 시민이 시청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26일(한국시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은 이날 오후 미국 LA총영사관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숨 가쁜 일정을 이어갔다. “아직도 정신이 없다. 수상한다고 생각도 안 했다”고 운을 뗀 그는 “친구들은 제가 상을 받는다고 했지만 저는 믿지 않았다. 인생을 오래 살아서, 배반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수상을 바라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제 이름이 불려지더라. 제가 영어를 잘 못하지만 사실 그거(수상소감)보단 잘 할 수 있었는데, 좀 엉망진창으로 한 것 같다. 그래서 좀 창피하다”고 솔직하게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스카 수상은 윤여정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은 아니었다. 윤여정은 “최고의 순간이란 건 없을 거다. 난 ‘최고’란 말을 싫어한다”라며 “그냥 다 최중(最中)으로만 살면 되는 거 아니냐.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지 않나. 아카데미 벽이 트럼프 벽(장벽)보다 너무 높아서 우리 동양 사람들한테는 너무 높은 벽이 됐다. 그런데 제 생각엔 최고가 되려고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최중만 되면서 살고, 우리 다 동등하게 살면 좋겠다”며 그의 특유의 입담을 발휘했다.
‘미나리’를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기교가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진지한 진짜 이야기였고, 그것이 늙은 나를 건드렸다”고 밝혔다. 이어 “그래도 제가 여우 같은 데가 있어서 정이삭 감독을 만나서 싫으면 안 했을 텐데 요즘 무슨 이런 애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진심이 느껴져서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진심을 담아 진심이 통한 영화’라고 ‘미나리’를 설명한 윤여정은 정이삭 감독에 대해서도 칭찬을 이어나갔다. 사진=연합뉴스
앞서 윤여정의 수상 소감에서는 고 김기영 감독이 언급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크린 데뷔작 ‘화녀’(1971)와 차기작 ‘충녀’(1972)를 함께 했던 거장 김기영 감독에게 있어 윤여정은 페르소나였다. 김기영 감독은 윤여정을 향해 “내 말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배우”라고 평한 바 있다.
윤여정은 “감독이 굉장히 중요하단 걸 60살 넘어서 알았다. 제가 스물한 살인가 스물두 살 때 김기영 감독님을 처음 만났는데, 정말 죄송한 건 제가 그분에게 감사하기 시작한 게 60살이 되고 나서라는 것”이라며 “그전엔 너무 힘들고 싫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후회되고 죄송스럽다”고 회고했다.
시상식을 앞두고 국민들의 성원으로 무거워진 어깨를 호소하기도 했다. 윤여정은 “사람들이 너무 응원해 너무 힘이 들어 실핏줄이 터졌다”며 상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이 “처음 받는 스트레스”가 됐었다고 말했다. 국가를 대표한 2002년 월드컵 축구선수들이나 전 피겨스케이터 김연아 선수의 심정을 알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런 윤여정에게 시상식이 끝난 지금은 후련함만이 느껴졌다. 윤여정은 “앞으로의 계획은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라며 “오스카상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남한테 민폐 끼치기 싫으니까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영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윤여정이 수상한 아카데미 연기상은 1957년 ‘사요나라’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에 역대 두 번째 아시아 여성 배우의 수상으로 국내외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영화배우로는 사상 최초의 수상이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