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천주교의 공식 입장과 다른 발언을 하면서 교계가 내분에 휩싸였다. 사진은 지난 4월 1일 명동성당에서 성유 축성 미사를 주례하는 정 추기경. 뉴시스 |
천주교 최고 지도자인 추기경에 대한 사제들의 공개적인 사퇴 요구는 전례가 없는 일로 천주교 사상 초유의 항명사태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파문이 커지자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 추기경은 4대강과 관련해 신자들이 찬반 입장에서 자유로워지고 4대강이 신앙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표명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양측의 갈등은 좀처럼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천주교계 내홍의 한가운데 서게 된 정 추기경은 과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정 추기경이 지금껏 걸어온 역정 속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은 1931년 12월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정 추기경은 출생 직후 명동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이복순 씨는 20세에 명동성당에서 당시 역관이었던 정 추기경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22세 때 정 추기경을 임신했던 어머니 이 씨는 주교의 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청년이 ‘저 주교 됐어요’라며 달려드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그리고 장차 ‘큰 일’을 할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날마다 기도를 했다고 한다. 지난 1970년 정 추기경이 주교 임명 사실을 알렸을 때 어머니가 과거의 태몽을 떠올리며 크게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외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는 1996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정 추기경은 계성초등학교 4학년 때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가톨릭의 7성사 중 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를 받았다. 그는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미사 복사(신부의 미사 집전을 보좌하는 소년)를 하루도 빠지지 않아 십자가를 상으로 받기도 했다.
정 추기경이 처음부터 사제의 길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45년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고 절대자를 향한 신앙과 유물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50년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한 그의 꿈은 놀랍게도 과학자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체험을 하게 되면서 심경에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특히 인간이 서로의 생명을 파괴하는 끔찍한 전쟁을 겪으며 잔혹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공학도의 꿈을 접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 가톨릭대 신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정 추기경은 “그때 하느님이 덤으로 주신 내 삶은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70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에 임명됐다. 그리고 2006년 2월 22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당시 교황청이 그를 추기경으로 승품한 이유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상징적인 서울대교구장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함께 맡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됐다.
임명 당일 오후 명동성당 옆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주교 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정 추기경은 “부족한 내가 추기경으로 선택받은 것은 내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한국 천주교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정 추기경의 추기경 임명 소식은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의 서임이후 37년 만에 누리는 경사였다. 추기경은 교황선거권을 갖는다는 의미 외에도 가톨릭교회의 중요 사업 결정시 추기경회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위상을 크게 높일 것으로 기대됐다.
정 추기경이 서임할 무렵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가족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 추기경의 아버지 정원모 씨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월북해 북한의 공업성 부상까지 지낸 사실 등이 공개된 것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누구도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탓에 정 추기경 본인도 서울대에 입학한 뒤 호적초본을 떼본 후에야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얼굴도 언론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 처음 봤다는 정 추기경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얼굴을 이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비극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잃어버린 유일한 민족일 것이다. 언젠가는 그 잃어버린 얼굴들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정 추기경은 북한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왔다. 1998년 6월 2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그는 1500여 명의 사제와 신도들에게 2m짜리 금장 지팡이를 보이며 “이 무거운 지팡이를 들고 평양교구를 돌 수 있도록 하느님께 떼를 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지팡이는 해방 직후 평양 초대 준교구장을 겸임하고 있던 패트릭 번 주교의 것으로, 그가 한국전쟁 때 서울대교구를 지키다 납북될 때 남긴 것이었다.
정 추기경은 한국 최연소 주교 기록을 갖고 있는 등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사제로 평가받아온 인물이다. 말수는 적지만 너그럽고 후덕한 인품으로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수 년 동안 그를 보좌해온 송열섭 신부가 “언젠가 책을 선물하는데 포장을 해서 드렸더니 왜 필요 없는 치장을 하느냐고 언짢아하신 것이 그분이 제게 한 유일한 꾸중이었다”고 했을 정도다.
정 추기경은 평소 근면절약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0년 청주교구장을 맡은 뒤 그는 연일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냈으며, 바지 1벌을 18년 동안 입을 정도였다. 또 식사 초대를 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소외감을 느낄 것을 우려해 식사초대를 거절하는 대신 교구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해왔다.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한 그의 애정은 신자들이 ‘생활비’조로 보낸 푼돈을 40년 동안 모아 1999년 5억 원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에 장학기금으로 쾌척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 추기경은 끊임없이 배우고 정진하는 소문난 학구파 스타일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교회법의 대가로 통한다. 1988년 <전국 공용 교구 사제 특별권한 해설>을 낸 것을 시작으로 ‘교회법 해설’ 관련 서적을 무려 15권이나 펴냈다. 뿐만 아니라 <목동의 노래>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 <구세주 예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 <민족 해방의 영도자 모세> 등 수십 권에 달하는 유명 저서들을 집필하는 등 지금까지 그가 출간한 저서와 번역서만 50여 권에 달한다.
정 추기경은 유독 과학과 생명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실제로 사형제도 폐지, 태아 생명 보전, 반전·반폭력 문제 등 민감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분명한 소신을 보이기도 했다.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귀중하며 특히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생명은 아무리 작고 약하다 해도 어떤 이유로도 실험도구와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가 생명윤리를 도외시한다면 비윤리적이고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역설해 왔다. 그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는 반대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또 “태아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낙태를 자행하는 사회가 인권을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며 완강한 낙태반대 입장을 보였다. 또 사학법 개정에 반대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던 정 추기경은 보수적 색채가 강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 추기경의 사목표어는 ‘옴니버스 옴니아’(모든 이에게 모든 것)다. 이는 평생 필요한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나 봉사한다는 뜻으로, 특히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세심한 정성을 쏟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주교 내분 사태를 맞은 그가 과연 모든 이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 지난 13일 천주교 전국 교구 원로사제들이 사회적 혼란과 교회 분열에 대한 정진석 추기경의 책임을 묻고 있다. 뉴시스 |
수뇌부·사제단 보혁갈등 폭발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래된 이래 한국 가톨릭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어온 인물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2006년 6월 새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 추기경에게는 고령의 김 추기경을 대신해 나라의 큰 어른으로 사회를 통합시키고 국민을 보듬어야 하는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런데 지난해 김 추기경의 선종 이후 한국 가톨릭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 추기경이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고, 김 추기경의 카리스마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정 추기경은 유신 시절부터 사회적 발언을 했던 김 추기경에 비해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생명윤리 등 이념적 측면에서 보수주의 색채가 강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특히 김 추기경이 정년을 맞아 은퇴한 지난 1998년 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하면서 일부에선 정 추기경의 보수우익 편향적 시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정 추기경의 성향으로 인해 그간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졌던 명동성당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기도회조차 허용하지 않게 됐다는 불만이었다. 무엇보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도왔던 사제단 대표를 맡은 전종훈 신부에 대해 정 추기경은 관행에도 없는 안식년 발령을 3년 연속 내린 바 있다. 또 가톨릭교회법상 교구장의 정년은 만 75세임에도 불구하고 79세인 정 추기경이 여전히 서울대교구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김 추기경이 만 75세 되던 해에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고 추기경직만 유지한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 추기경에 대한 용퇴요구는 그간 쌓여온 정 추기경에 대한 내부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정 추기경의 이번 발언이 4대강 반대를 표명해온 주교단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판단한 사제단의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현재 천주교계에서 정 추기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그가 권력에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그간 문화재청에서 계속 반대해온 명동성당 재개발사업이 통과된 것과 관련해서도 찜찜한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에 교계 일부에서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됐을 때 김수환 추기경이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했던 말을 반추해 그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김 추기경의 신념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 수뇌부를 겨냥한 일부 전·현직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항명과 관련해 일부 신자들이 반발하는 등 역풍도 만만치 않다. 특히 사제단 전·현직 지도부가 이례적으로 교구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동시에 명동성당 재개발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은 천주교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반한다는 것이다.
사제단에 우호적이지 않은 서울대교구 수뇌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 더 나아가서는 그간 여러 가지 정치적 현안에 대해 찬반 입장을 표명해온 사제단과 중립을 고수해온 천주교 수뇌부 간의 보·혁 갈등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