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마스카라와 비슷한 모양의 전동 칫솔 ‘포켓돌츠’ ②밥에 비벼 먹는 조미료 ‘고추기름’ ③인스턴트커피머신 ‘바리스타’ ④가볍고 화질 뛰어난 하이브리드 카메라 올림푸스 ‘펜 라이트’ ⑤아이스크림에 딸기 케이크를 얹은 디저트. |
2008년 경제위기 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기 불황의 바람이 아직도 매섭다. 이러한 가운데 2010년 일본에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 소박하지만 럭셔리하게 즐기려는 소비패턴이 크게 유행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자산관리회사의 비즈니스 마케팅 보고서 ‘2010 히트 아이템 랭킹’에서는 이런 양상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소박한 사치(쁘띠 럭셔리)’를 꼽는다. 즉 절약을 위해 돈을 아끼면서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투자나 개성을 살리는 소비 스타일은 한층 강해졌다는 것. 2010년 일본의 대박 상품을 살펴본다.
고추기름과 스마트폰. 둘 다 2010년 일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박 아이템이다. 대체 어느 게 더 많이 팔렸을까. 고추와 유채기름에 볶은 마늘, 참기름, 간장 분말, 아몬드, 양파 분말, 파프리카 색소를 가지각색으로 넣어 만든 고추기름은 전통적으로 밋밋하고 싱거운 맛을 선호해 온 일본 소비자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밥에 얹어 비벼 먹거나 조미료로 각종 요리에 넣어 먹는 매콤달콤한 맛이 제법이다. 2010년 내내 인터넷 검색에는 고추기름 요리를 만들려고 레시피를 찾는 질문이 줄을 이었다.
스마트폰도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처럼 일본에서도 스마트폰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전화는 단순히 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 여태까지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디지털 IT 계통 제품군은 단연 눈에 띄는 아이템이다.
각 조사마다 다르지만 고추기름과 스마트폰은 인지도와 화제성, 매출 부문에서 서로 1, 2위를 다퉈 둘 중 어느 게 더 대박 상품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마다 히트상품 랭킹을 내놓는 <일본경제신문>의 트렌드 보고서와 일본의 광고대행업계의 분석 보고서, 쇼핑몰 랭킹 결과가 엇갈린다. 하지만 이들 보고서가 공통으로 드는 점이 있다. “소비자들이 상품에서 단순한 가치를 얻는 것보다 새로운 기능이나 자극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씀씀이가 큰 지출은 가능한 자제하면서 기분 전환을 위해서 적당한 가격으로 참신함을 주는 소박한 사치(쁘띠 럭셔리) 제품을 과감히 찾는다. 이런 경향에 대해 미쓰이스미토모 자산관리 주식회사가 12월 초 내놓은 ‘2010 마켓 키워드’ 보고서는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제품들이 주목받았다”고 평가한다.
이런 흐름은 히트 식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지방에 직접 가서 신선하고 값싸게 즐길 수 있는 라면과 국수 등 서민적 식도락을 일컫는 ‘B급 식도락’, 위스키를 소다수에 탄 칵테일 ‘하이볼(Highball)’, 한 입 베면 터져 나올 정도로 가득 생크림을 넣었지만 단돈 150엔(약 2000원)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롤케이크 및 아이스크림 위에 말랑말랑한 딸기 케이크를 얹은 디저트나 초콜릿 음료 디저트를 일컫는 248엔(약 3400원)짜리 ‘신식감(新食感) 스위츠’ 등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풍미를 돋우는 먹거리가 각종 2010 히트 랭킹 30위 권내로 진입했다. 전자레인지로 구울 수 있는 생선구이 제품 ‘노릇노릇 생선구이’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2010년 1년간 무려 270만 개나 팔렸다.
물론 이런 소박한 사치 제품이 대박 히트를 하려면 입소문도 타야 한다. 특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게 중요하다. 마스카라와 같은 크기와 디자인으로 화장품 가방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깔끔한 전동 칫솔 ‘포켓 돌츠’는 3500엔(약 4만 8000원)인데 올 3월에 나와 3개월 만에 38만 개가 팔렸다. 젊은 여성이 먼저 구입하기 시작해 나중에는 제조회사의 목표보다 3배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전동 칫솔은 집에서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깼다. 무게 300g으로 가볍고 화질이 뛰어난 하이브리드 카메라 올림푸스 ‘펜 라이트’도 역시 젊은이들의 입소문을 탔다.
어쨌든 알맞은 가격에 조금은 럭셔리한 제품을 찾는 흐름이 확연했다.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이제 불황 속에서도 어느 정도 차별화된 제품을 원하는 ‘구별 소비법’이 자리 잡는 것 아니냐”며 입을 모은다.
인스턴트커피머신 ‘바리스타’도 동네 슈퍼 가판대에서 불티나듯 팔렸다. 알뜰살뜰하기로 소문난 일본 주부들이 입소문으로 앞 다퉈 구입한 이 커피머신은 7980엔(약 11만 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3월에 나와 11월 즈음까지 100만 대가 팔렸다고 한다. 인스턴트 커피가루를 넣어 카푸치노, 카페라떼, 블랙, 에스프레소 등을 만들어 좀 더 고급스러운 맛을 즐길 수 있다.
한마디로 소비자는 더 똑똑해졌다. ‘단지 싸기만 한 것’이란 인식을 주게 되면 히트 대열에 낄 수 없게 된 것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올해도 여전히 히트한 ‘패스트패션(fast fashion)’도 그렇다. ‘패스트패션’이란 ‘패스트푸드’를 모방한 말로 최신 유행을 넣으면서 저가로 승부하는 의류제품을 말한다. 짧은 사이클로 세계적으로 대량 생산해 판매하는 유니클로, GAP, H&M, ZARA, FOREVER21 등이 인기를 끌었다. 또 원하는 여행을 싸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한 저가항공권도 인기를 끌었다. 엔화 강세로 일본의 해외수출기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해외여행객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한편 친환경 제품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LED 조명기와 전기자동차 등도 꾸준히 팔렸다. 일반 가정용 LED 조명은 2009년 당시만 해도 평균 가격이 1만 엔(약 13만 8000원) 정도였는데 2010년에는 평균 가격이 3000엔(약 4만 원)까지 떨어졌다. 그 결과 전체 전구 시장에서 LED 비율이 20%로 급증했다. 또 사용량은 적어도 세정력이 좋아 절수 및 절전이 가능한 세탁용 세제 ‘나녹스’도 인기를 끌었다. 철심이 필요 없는 ‘에코호치키스’도 나온 지 3개월 만에 26만 개가 팔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호치키스 철심이 들어가기 쉬운 식품제조공장이나 아이가 있는 가정 등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자산관리회사의 보고서는 2011년에도 당분간 소비자의 절약 소비와 구별 소비 지향 방식이 동시에 강세일 것으로 내다본다. 즉 라이프스타일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상품이 시장에서 주목받는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안경을 안 끼고 맨눈으로 볼 수 있는 3D TV와 쌀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가정용 빵 제조기, 2010년 다소 주춤했던 아이패드 등도 어플리케이션이 충실히 확보되는 2011년에는 히트작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