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난감: 41×27cm Acrylic, oil, wallpaper on canvas 2019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전문이다. 1981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오지 않는 희망. 그러나 접을 수 없는 마음을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미지에 실었다. 아직도 놓지 못하는 희망을 귀향과 추억으로 담았다. 그렇지만 눈물 나는 현실은 여전하다. 무엇보다도 목청이 한껏 높아져 있었던 그 시절의 시들과는 달리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호소하는 시인이 마음에 남았다.
신기루를 좇다: 65×91cm Acrylic, oil on canvas 2019
많은 이들이 높낮이와 크기는 다를지라도 고만고만한 핸디캡을 가지고 살아간다.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앞으로 오리라는 희망에 대한 믿음이다. 곽 시인의 시처럼 간이역에서 고향으로 데려다 줄 막차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현실을 극복하는 힘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다. 그게 희망이자 이상향인 셈이다.
권주안 작가의 작업도 이런 믿음을 담고 있다. 그의 회화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에서 진정한 작가로 살아남는 일은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 여성 작가는 더욱 더 그렇다. 그 힘겨운 여정을 묵묵히 감내하며 작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스토리텔링 회화다. 그래서 권주안에게 그림은 살아가는 에너지이고,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이다.
겨울이 오다: 61×91cm Acrylic, oil, wallpaper on canvas 2020
그의 작업에는 성곽과 맑은 하늘 그리고 얼룩말이 등장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대한 상징이다. 하늘은 이상향이며 성곽은 힘겨운 현실의 벽이다. 얼룩말은 작가 자신을 의인화한 것이다. 자신의 힘겨운 삶을 이야기하는 그림이지만 환상적이며 밝은 분위기다. 희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