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시장에서 견고한 입지를 다진 일부 기업 중에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경영권과 지분을 매각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대기업의 경우 총수 일가의 지분이 많은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상속세 재원을 마련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2019년 5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상속세제 개선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상속세에 부담 느껴 경영권 포기한 기업 살펴보니
유니더스는 상속세를 내지 못해 경영권이 바뀐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7년 11월 김성훈 전 유니더스 대표는 당시 보유 중이던 유니더스 지분 34.88%를 바이오제네틱스투자조합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유니더스는 김성훈 전 대표의 부친 고 김덕성 유니더스 회장이 1973년 설립한 회사로 한때 글로벌 콘돔 생산 1위 자리에 올랐다.
김덕성 회장이 2015년 별세한 후 유니더스 지분은 김성훈 전 대표가 물려받았다. 김 전 대표가 납부해야 할 상속세는 5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당초 김 전 대표는 10년 동안 매년 약 5억 원씩 연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니더스의 경영이 악화돼 매년 적자를 기록했고, 김 전 대표는 배당금은커녕 회사 대표이사로서 받는 월급도 매년 줄어들었다. 상속세를 내지 못한 김 전 대표는 유니더스 지분을 매각해야만 했다.
국내 대표 종자·묘목 생산 업체 농우바이오도 상속세를 내지 못해 경영권에 변화가 있었다. 농우바이오의 기원은 1981년 설립된 농우종묘사로 1990년 법인으로 전환됐다. 고 고희선 농우바이오 창업주는 2007년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도 화성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12년 총선에서도 당선돼 재선에 성공했다.
고희선 창업주가 2013년 폐암으로 별세한 후 장남 고준호 씨가 농우바이오 지분을 상속받았다. 고준호 씨가 내야 할 상속세는 1000억 원이 넘었지만 현금이 없었던 고 씨는 상속받은 주식을 매각해 상속세를 마련해야 했다. 결국 고 씨와 특수관계자는 2014년 9월 농우바이오 지분 52.82%를 농협경제지주에 2834억 원을 받고 매각했다. 고 씨는 주식을 매각한 후 농업회사 고희선그룹을 설립해 현재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손톱깎이 제조업체 쓰리쎄븐은 한때 글로벌 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곳이다. 고 김형규 쓰리쎄븐 창업주가 2008년 별세하면서 유족들은 약 150억 원의 상속세를 내야 했지만 현금을 마련하지 못해 쓰리쎄븐 지분 전량을 중외홀딩스(현 JW홀딩스)에 매각했다.
중외홀딩스는 쓰리쎄븐 손톱깎이 사업부를 물적분할해 분할법인 쓰리쎄븐과 존속법인 크레아젠홀딩스(현 JW신약)로 나눈 후 티에이치홀딩스에 쓰리쎄븐을 매각했다. 티에이치홀딩스의 대표는 김형규 창업주의 사위이자 2004~2008년 쓰리쎄븐 대표를 역임했던 김상묵 대표다. 김상묵 대표는 현재 쓰리쎄븐 대표도 겸임하면서 손톱깎이 사업부에 대한 경영권은 되찾은 셈이다. 그러나 상속세로 인해 회사를 온전히 승계 받지는 못했다.
이처럼 상속세로 인해 경영권을 포기하는 사례가 나오자 재계에서는 상속세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상우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경제조사본부장은 “우리 기업의 영속성 확보와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라도 상속세 최고세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 수준으로 인하해야 한다”며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적용되는 일률적인 최대주주 주식 할증평가를 폐지해야 한다”고 전했다.
정치권 일부에서도 상속세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나온다.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0년 11월 확대간부회의 모두발언에서 “락앤락, 유니더스, 농우바이오, 쓰리쎄븐은 국내 또는 해외 시장을 재패한 1등 기업이었지만 지금은 경영권이 모두 넘어갔다”며 “가업 승계를 두 번만 하면 상속세 때문에 회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기업인들의 토로는 자조가 아닌 현실이었다”고 전했다. 다만 김준일 전 락앤락 회장은 상속세 때문에 지분을 매각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다.
#상속세 마련 꼼수 ‘일감 몰아주기’
주요 대기업들이 창업 3~4세 시대를 맞으면서 상속세 마련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숙제로 떠올랐다. 한때 재계에서는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상속세를 마련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다. 상속자가 대주주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줌으로써 회사 가치를 높이고, 상속세를 내야 할 시기에 해당 회사 주식을 매각해 상속세를 마련하는 식이다.
현행법상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회사(비상장사는 20% 이상)가 200억 원 이상의 내부거래액을 기록하거나 연매출의 12% 이상이 내부거래에서 발생하면 일감 몰아주기 조사 대상에 오른다. 조사 대상에 오른다고 무조건 일감 몰아주기로 처벌받지는 않고,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내부거래를 해야 일감 몰아주기에 해당한다. 대부분 대기업은 지분율을 30% 이하로 맞추거나 ‘상당히 유리하지는 않은 조건’에 거래해 일감 몰아주기 제재를 피하고 있다.
국내 대표 대기업인 삼성그룹은 삼성SDS에 일감을 몰아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서울 송파구 삼성SDS 본사. 사진=박정훈 기자
국내 대표 대기업인 삼성그룹은 삼성SDS에 일감을 몰아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삼성SDS는 삼성그룹의 시스템통합(SI) 업체로 2020년 매출 11조 174억 원 중 약 70%에 달하는 7조 7009억 원이 삼성그룹 내부거래로 발생했다. 삼성SDS의 최대주주는 지분율 22.58%의 삼성전자지만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자녀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지분율 9.20%),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3.90%),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3.90%)도 삼성SDS 지분을 갖고 있다.
삼성그룹의 일감에 힘입어 삼성SDS는 매년 성장을 거듭했다. 삼성SDS의 자본총액은 2000년 1302억 원에서 2020년 6조 8591억 원으로 20년 동안 50배 넘게 상승했고, 같은 기간 매출은 1조 2606억 원에서 11조 174억 원으로 9배 가까이 늘었다. 삼성SDS의 현재 주가(5월 4일 기준 18만 1000원)를 기준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 가치를 계산하면 1조 2885억 원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최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삼성SDS 지분을 상속세 연부연납 납세 담보로 제공해 상속세 납부에 활용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SDS 지분을 매각하더라도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총 39.66%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지배력에도 문제가 없다.
이재용·이부진·이서현 삼남매의 삼성SDS 지분을 모두 합치면 17% 수준으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은 아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꼼수라는 비판은 피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SDS 관계자는 “신속성·보안성이 중요한 SI 업계 특성상 내부거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내부거래 비중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일감 몰아주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현대글로비스의 2020년 매출 16조 5199억 원 중에서 70%가 넘는 11조 8695억 원이 내부거래로 발생했다.
2001년 설립된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물류를 담당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의 자본총액은 2001년 말 90억 원에서 2020년 말 5조 664억 원으로 19년 동안 560배 상승했다. 같은 기간 매출은 1985억 원에서 16조 5199억 원으로 80배 이상 늘었다. 현대글로비스의 현재 주가(5월 4일 기준 19만 4000원)를 기준으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가진 현대글로비스의 지분 가치는 1조 7000억 원에 달한다.
현재 현대글로비스의 최대주주는 지분율 23.29%의 정의선 회장이고, 2대주주는 6.71%의 정몽구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다.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합치면 29.99%로 30%가 넘지 않아 삼성SDS와 마찬가지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말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현대글로비스도 규제 대상에 포함될 예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에 따르면 올해 말부터 상장사·비상장사 구분 없이 총수 일가 지분이 20% 이상인 회사와 이들 회사가 지분 50% 초과로 보유한 자회사는 모두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다. 이에 대해 현대글로비스 관계자는 “정 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문제는 개인의 일이라 답변하기 어렵다”면서도 “법이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겠다”라고 전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일감 몰아주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20년 7월,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와 ‘수소모빌리티+쇼’에서 현대차의 수소차 ‘넥쏘’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 밖에 판토스, 한화S&C, GS ITM 등도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있었지만 총수 일가가 지분을 매각하면서 논란은 줄어든 상태다. 2017년 말 기준으로 구광모 LG그룹 회장 일가는 판토스 지분 19.90%를 보유하고 있었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세 아들 김동관·김동원·김동선은 한화S&C 모회사 에이치솔루션 지분 100%를 갖고 있었다. GS ITM 역시 허창수 당시 GS그룹 회장 일가 17명이 지분 80.60%를 소유했다.
구광모 회장 일가는 2018년 판토스 지분 전량을 매각했고, 같은 해 허창수 회장 일가도 GS ITM 지분 대부분을 매각해 현재 GS ITM은 GS그룹 계열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다만 허서홍 GS에너지 전무, 허윤홍 GS건설 사장, 허선홍 씨, 세 명은 아직도 GS ITM 지분을 보유 중이다. 이들이 가진 GS ITM 지분은 총 8.76%로 경영권을 노릴 수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GS ITM과 GS그룹은 거래 관계를 유지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S&C는 2018년 한화시스템과 합병했고, 에이치솔루션은 합병 후 한화시스템 지분 13.41%를 갖고 있다. 한화시스템의 2020년 매출 1조 6249억 원 중 25.55%인 4198억 원이 내부거래로 발생했다.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나 내부거래 비중이 줄었지만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대기업 총수 일가들이 일감 몰아주기로 자산을 증식하고, 이를 상속세 재원 마련에 활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올해 말부터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확대될 예정이지만 법 적용이 애매해 실제 일감 몰아주기로 처벌받은 사례는 많지 않다.
참여연대 한 관계자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재계는 내부거래의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과도한 규제라는 프레임으로 대응했다”며 “특권을 가진 총수 일가의 투자를 제한하는 것이 폐해를 근절하는 방안으로 보이고, 이들이 투자를 하고 싶다면 정말 투자를 받고 싶어 하는 스타트업에 엔젤투자를 하면 된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