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수 한지장이 전통 한지를 만드는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옛사람들은 전통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곤 했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등 아흔아홉 번의 손길을 거친 뒤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견(絹)오백 지(紙)천년”이라는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이는 500년을 가는 비단에 비해 한지는 그 곱절에 해당하는 1000년을 견딘다는 뜻이다. 신라시대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자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이기도 하다. 이 경전은 석가탑을 창건한 당시인 신라 경덕왕 10년(751) 탑 안에 담겨 봉해졌으니 130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오롯이 견뎌낸 셈이다.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도입됐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고구려 승려 담징이 종이, 먹 등의 제작 방법을 전해준 것으로 기록된 ‘일본서기’ 등 몇몇 문헌에 따르면 적어도 삼국시대에 종이 만드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소개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천연재료로 염색한 다양한 색상의 한지. 사진=문화재청 제공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한지가 ‘외교 필수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한지의 품질이 좋아 중국이 조공품으로 종이를 자주 요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 세종 7년(1425) 2월 15일자에는 명나라 사신이 “종이를 제조하는 방문을 바치라”고 요구한 일도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 종이를 뜻하는 한지는 일본의 종이인 ‘화지’, 중국의 종이인 ‘선지’와 구별하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제조 방식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지는 질기면서도, 보온성과 통풍성이 아주 우수하다.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잘 빨아들이고 내뿜는 성질이 있어 잘 찢어지지 않아 수명이 오래간다. 우리 선조들이 한지로 비바람을 막는 삿갓과 갑옷, 마른 음식을 저장하는 그릇이나 항아리까지 만들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통 한지는 지통에서 종이물을 거르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사진=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전통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닥나무 채취, 껍질 벗기기, 껍질 삶기, 껍질 씻기, 껍질 두드리기, 껍질에 닥풀 뿌리 진액을 혼합해 종이물 만들기기, 종이물 걸러 한지 뜨기, 한지 말리기 등 크게 여덟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통 한지가 천연재료의 특성을 잘 활용해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지를 뜰 때 종이물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번갈아 흘려보내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종이결을 얽히게 만드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인열 강도(종이를 옆으로 찢었을 때 견디는 힘)와 인장 강도(종이를 위아래로 잡아당겼을 때 버티는 힘)가 그 어떤 종이보다 우수한 ‘명품 종이’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전통 한지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종이가 대거 유입되면서 설 자리를 차츰 잃었고, 해방 후에는 대량 생산된 서양의 종이가 수입되면서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근래 들어선 한지를 만들 때 생산원가와 제작 공정의 편의 때문에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전통 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한지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배경이기도 하다.
한지장은 초대 보유자인 고 류행영, 2대 보유자인 고 장용훈 선생을 거쳐 현 보유자인 홍춘수를 통해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전통 한지의 복원과 전승이라는 외로운 길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걸어온 이들이다. 전통 한지를 지키고 한지 문화를 발전시키는 가장 현명한 길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국민이 실생활에서 한지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만들어 내고 또 다양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 속에 녹아 있는 유산이야말로 가장 생명력 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