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쿠르트 임창용이 지난 12월 28일 IB스포츠와 국내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는 기자회견을 끝내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김응용 전 감독
임창용한테 김응용 전 감독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존재다. 1995년 해태 입단시부터 인연을 맺은 관계가 삼성으로 옮겨가면서 또 다른 색깔로 덧입혀졌다. 해태 시절, 임창용은 김 전 감독의 애제자였다. 당시 하와이 전지훈련을 갔을 때 김 전 감독은 훈련 마치고 들어오는 임창용을 따로 불러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간식 사먹으라고 챙겨줬을 정도다.
“그땐 그랬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독님은 저랑 눈도 안 마주치셨어요. 아마도 제가 2002년 대구 한화전 때 8회에 강판당한 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글러브를 내팽개치며 감독실 문을 발로 걷어찼던 사건 이후부터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요. 해태 시절엔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고 그에 대해선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런데 저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제 편을 안 들어주시더라고요. 한때는 그런 감독님한테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감독님의 그런 모습에 자극받고 오기를 갖게 됐어요. 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됐었죠.”
동갑내기 이승엽
이승엽과 임창용은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생활했었다. 두 사람이 일본 무대로 옮겨갔을 때 으레 빈번한 접촉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승엽이와 맞붙었을 때였어요. 마침 경기가 야쿠르트 홈구장에서 벌어진 터라 일부러 훈련 마치고 요미우리 훈련장을 찾아가 승엽이한테 시간 나면 밥이나 먹자고 제의했었죠. 그런데 연락이 없더라고요. 그후로 전화 한 통 못해봤던 것 같아요. 제가 삼성 입단했을 때 첫 해에는 승엽이랑 친하게 지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점점 사이가 멀어지더라고요. 왜냐고요? 글쎄요. 저보단 승엽이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을까요?”
임창용은 2004년 자유계약선수(FA)가 됐을 때 삼성에 이런 제안을 했었다. “나도 이승엽처럼 100억 원을 달라”고. 즉 삼성이 이승엽을 붙잡기 위해 제시했던 몸값 100억 원을 자신도 받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왜 당시 이승엽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는지 궁금해졌다.
“겉으로 보기엔 이승엽이 초특급 스타였지만 성적을 놓고 봤을 때는 제가 1등이었어요. 그래서 자존심을 내세운 거죠. 그건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성적만으로도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삼성의 반응이 완전 싸늘했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하는 분위기였죠.”
임창용은 2007년, 3000만 엔(3억5000만 원)의 연봉을 받고 일본으로 향하면서 ‘100억을 벌어오겠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3년 만에 그 목표의 2배를 넘는 209억 원의 재계약에 성공했다. 연봉만 놓고 봤을 땐 무려 17배의 인상액이다. 한국에서 104승 168세이브 기록을 올렸던 그가 일본에서 3년 동안 96세이브를 찍고 특급 마무리 투수로 성공 신화를 쓴 것이다.
선동열 전 감독
임창용과 인터뷰할 때만 해도 선동열은 삼성 감독이었다. 임창용은 선 감독 얘기를 꺼내자 2005년 팔꿈치 수술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당시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부진한 모습을 보이니까 선동열 감독님께서 엔트리에서 빼시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게임을 안 뛴 적이 없었거든요. 팀에서 필요로 할 땐 팔에 통증을 느껴도 핑계대지 않고 등판했어요. 그러다 인정사정없이 엔트리에서 제외되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수술이나 받자고 생각했던 거죠. 토미 존 서저리(팔꿈치인대접합수술)로 유명한 LA 조브클리닉의 조브 박사한테 직접 수술을 받았는데 제가 그분의 마지막 환자였다고 해요. 그 후론 현장에서 은퇴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수술 후 삼성을 떠나기 전까지 참 많이 힘들었어요. 주로 2군에서 머물다보니 생각할 시간도 많았고요. 그때 정말 인생 공부 많이 한 것 같아요. 결과론적이지만 당시 선 감독님이 절 엔트리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수술도 안 받았다면 제가 일본으로 가지도 않았겠죠? 인생 참 재밌지 않아요?”
주장 미야모토 신야
임창용이 요미우리의 끈질긴 구애를 거절하고 야쿠르트에 잔류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동료들의 따뜻한 정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야쿠르트 주장 미야모토 신야는 임창용에게 의리와 신뢰를 안겨줬다. 입단 초부터 한국에서 온 용병을 살뜰하게 챙긴 미야모토는 임창용이 팀에 남아줄 것을 강권했고, 결국 임창용은 돈의 많고 적음보다는 자신을 인정하고 믿어주는 선수들을 택한 것이다.
“사실 일본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은퇴 후 지도자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야모토를 만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미야모토는 미래의 야쿠르트 지도자로 손꼽히는 선수예요. 그만큼 구단이나 선수들의 신망이 두텁죠. 만약 제가 일본에서 지도자를 한다면 미야모토가 팀을 이끄는 가운데 전 거기서 코치로 일하고 싶어요. 일본의 야구 환경이 아주 좋잖아요. 선수뿐만 아니라 팀을 이끄는 부분도 배울 게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선 감독이 아닌 코치 생활은 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제 성격상 힘들다고 봐요.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잖아요. 한국에선요.”
인생의 동반자
30대 중반의 나이에 훤칠한 외모와 날렵한 몸매, 재력까지 갖춘 그가 딱 한 가지 빠지는 부분이 있다면 여전히 독신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2년 사생활과 관련해서 엄청난 시련을 겪은 탓인지 이상하게도 임창용은 결혼 문제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너무 큰일을 겪고 나니까 한 여자를 끝까지 좋아하며 살 자신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게 가장 부담이 됐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종종 만나는 여자는 있었지만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은 혼자 지내는 게 편해요. 제가 잠도 많고 여자한테 잘해주는 스타일이 아니라 별로 인기도 없어요.”
하지만 부모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3남2녀 중 막내인 임창용이 나이 먹어서도 혼자 지내는 게 안타까웠던 임창용의 어머니는 유명한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임창용의 맞선을 진행시키려다 아들의 반발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결혼정보회사 가입비가 엄청나게 비싸더라고요. 괜한 돈 낭비라는 생각에 어머니 부탁을 거절했던 거죠. 그런데 가입해서까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임창용한테는 조카가 5명이나 된다. 그중 누나 아들은 임창용의 열렬한 팬이자 임창용을 롤모델로 꼽고 있다고 한다.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구부에 입단해선 자신의 삼촌이 임창용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니는 조카를 보면서, 임창용은 은근 행복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요. 저한테도 빨리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나중에 결혼해서 제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가 뭐했던 사람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야구하고 있을 때 아이가 성장해야 하는데, 아직은 결혼도 못했으니…, 있지도 않을 미래의 아이를 떠올리면 괜스레 가슴이 설레고 그래요.”
임창용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통장 잔고가 ‘제로’였다고 고백했다. 가족들 모두 다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낌없이 지원을 해줬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 일본 진출 후에는 자신이 직접 통장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돈을 너무 쉽게 썼어요. 그런데 돈을 직접 챙기면서부터 재테크에 대한 개념이 세워지더라고요. 지금은 모든 걸 은행에 맡기고 있어요. 다른 데 신경썼다간 야구에 소홀해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감독할 때 소신 잃지 않고 할 말 하고 사는 지도자로 생활하고 싶어요. 잘려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 수 있게 말이에요.”
야구했던 시간보다 야구할 날이 훨씬 적게 남은 임창용한테 목표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한국 선수 중 가장 오랫동안 야구하는 선수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마흔다섯 살까지 선수로 뛰고 싶어요. 김정수 선배가 마흔셋인가? 넷에 은퇴를 하셨잖아요. 전 마흔다섯 살까지 갔음 좋겠어요. 그리고 은퇴는 일본도 메이저리그도 아닌 한국에서 할 계획입니다. 삼성에서 풀어만 준다면 그 마무리는 KIA 타이거즈가 됐음 하고요. (김)병현이도 마지막엔 KIA 유니폼을 입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면서요? 병현이랑 한 팀에서 뛰게 된다면 볼 만 하겠죠? 빨간색 유니폼을 다시 입고 싶어요.”
riveroflym@ilyo.co.kr
요미우리랑은 인연이 아닌가봐~
인터뷰를 2시간 가까이 진행하다보니 쓸 내용이 차고 넘쳤다. 그래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내용을 Q&A로 재구성해 본다.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선 요미우리 진출을 소원해왔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정도 요미우리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틀어지곤 했다. 아쉽지 않나.
▲이전에는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랑 요미우리랑은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인연이었다면 벌써 그 팀에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요미우리란 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할 것 같다.
―혹시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힘든 모습을 보였던 부분이 요미우리에 대한 마음을 접는 데 영향을 미쳤나.
▲전혀 그렇지 않다. 선수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잊히는 게 인지상정이다. 특히 용병은 실력으로만 평가받는다. 요미우리든 어느 팀이든 내가 잘한다면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투수들 중 선동열 전 감독 외에는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선수가 없다. 이 부분이 임창용 선수를 자극시키는 요인이 됐나.
▲그런 건 없었다. 나 또한 일본 진출 초반에는 걱정이 많았다. 야구 전문가들이 모두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데서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다. 그런데 시즌 개막전 때 팀 마무리였던 이가라시가 부상을 당했고 그 다음 경기부터 내가 마무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나한테 보직이 주어졌다는 게 너무 기뻤지만 선수한테 미안해서 내색도 못하고 지냈다.
―박찬호 선수가 오릭스에 입단했다. 그 소식을 제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찬호 형이 용감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희로애락을 겪고 일본 무대에 도전하는 자세는 정말 본받을 만하다. 어쩌면 내가 한국에 있다가 헐값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일본에서 꼭 좋은 모습 보여주시길 바란다. 리그가 달라 자주 만날 일은 없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찾아뵙고 식사도 하고 싶고 그렇다.
―지난 번 시즌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뉴욕양키스의 포스트시즌을 관전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진출 얘기가 오갈 때라 미국 방문 자체에 관심이 컸다.
▲메이저리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까 정말 야구할 맛이 나겠더라. 관중들로 꽉 찬 시설 좋은 야구장과 팬들의 응원 문화, 야구에 대한 뜨거운 사랑 등이 너무 부러웠다. 어느 팀과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간 건 아니다.
―2011년 ‘구원왕’ 타이틀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남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일본에서 야구하는 동안 타이틀을 따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2등은 많이 해봤지만 1등을 못했다. 1등 한 번 해보고 싶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