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회장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롯데그룹은 바이오 투자 결단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신사업에 대해서도 내부 검토만 진행할 뿐, 대규모 투자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업종 특성상 불확실성이 높아 사업성을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사업이 부진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신사업 진출을 미룰 수만도 없어 롯데그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바이오뿐 아니라 각종 신사업에 대해 의지를 보이고 있다. 2017년 4월 당시 롯데월드타워 개장식에 참석한 신동빈 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대기업들의 새로운 캐시카우 바이오
최근 삼성그룹, SK그룹 등은 바이오 사업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실적은 매년 상승세다. 지난해 매출 1조 1648억 원, 영업이익 2928억 원을 기록했다. SK케미칼에서 2018년 분할된 SK바이오사이언스도 매출 2256억 원, 영업이익 377억 원을 거뒀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올해 3월 코스피 상장을 앞두고 진행한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예측에서 1275.47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아스트라제네카(AZ) 코로나19 백신의 국내 유통을 맡아 올해 역시 호실적이 예상된다.
LG그룹도 LG화학을 통해 바이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LG화학은 2017년 바이오 사업 집중 육성을 위해 LG생명과학을 흡수합병했다. LG화학은 올해 바이오 사업 연구개발(R&D)에 2000억 원가량을 투입할 계획이다.
바이오 사업은 성과를 내기까지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지만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그만큼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대기업은 중소·중견기업보다 자본력이 강하고, 투자를 받기도 용이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편이다. LG화학 측도 “(바이오 사업은) 개발의 난이도가 높고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지만 가치와 혁신에 대한 보상이 분명한 산업”이라고 전했다.
#롯데그룹의 엔지켐생명과학 인수설
롯데지주는 지난 3월 23일 “바이오 사업에 대해 검토 중에 있다”고 공시했다. 이는 다른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캐시카우를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실제 삼성·SK·LG 등이 바이오와 2차전지 등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롯데그룹의 유통과 화학 사업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롯데쇼핑의 매출은 2019년 17조 6220억 원에서 2020년 16조 1844억 원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롯데케미칼의 매출은 15조 1235억 원에서 12조 2230억 원으로 하락했다.
롯데그룹의 바이오 사업 진출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에서는 롯데그룹이 엔지켐생명과학을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엔지켐생명과학은 1999년 설립된 신약 개발 업체로 대표 제품으로는 면역조절 건강기능식품 ‘록피드’가 있다. 삼일회계법인 회계사 출신 손기영 엔지켐생명과학 회장이 현재 회사를 이끌고 있다.
엔지켐생명과학이 크게 알려진 회사는 아니었지만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면서 업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코로나19 임시 선별검사소 전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박정훈 기자
엔지켐생명과학은 일반인이나 투자자에게 널리 알려진 회사는 아니었지만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구강점막염과 호중구감소증의 치료제로 개발 중이던 신약후보물질 ‘EC-18’이 코로나19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코로나19 치료제 임상 시험을 신청했다. 현재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엔지켐생명과학에 대해 “코로나19 치료제의 국내 임상 2상 환자 모집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으며 임상데이터 결과 분석이 종료되면 식약처에 긴급사용승인 또는 조건부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라며 “코로나19 치료제 개발 가능성 등이 가시화되면서 회사 성장성 등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최근에는 자회사 ‘메쎄나’를 설립해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위탁생산(CMO) 사업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엔지켐생명과학은 2022년까지 mRNA 백신 1억 도즈 생산을 목표로 충청북도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 부지 1만 7520㎡(약 5300평)에 mRNA 백신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미국 모더나와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도 mRNA 방식으로 개발돼 추후 코로나19 백신 CMO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롯데그룹이 엔지켐생명과학을 인수하더라도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지 못하면 실적 기여는커녕 그룹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엔지켐생명과학은 2020년 매출 258억 원, 영업손실 191억 원을 기록하는 등 최근 몇 년간 매출이 하락세에 있고,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롯데그룹 내부에서도 엔지켐생명과학 인수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연구개발(R&D)을 통한 신약 개발은 일반적으로 막대한 비용과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며 “신약 개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투자된 금액과 시간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 창출이 가능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한편 롯데그룹은 바이오뿐 아니라 2차전지, 스마트 모빌리티 등 각종 신사업을 검토 중이지만 현재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이베이코리아 인수 등 기존 사업 강화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롯데그룹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롯데쇼핑은 올해 1분기 매출 3조 8800억 원, 순손실 406억 원을 기록하면서 실적 부진을 이어가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1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매출도 상승했지만 하반기부터 공급 과잉에 의한 가격 하락이 우려돼 안심할 수만은 없다. 롯데케미칼 측도 지난 5월 7일 컨퍼런스콜에서 “2분기 이후에는 공급 측면에서 압박이 다소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롯데그룹 관계자는 “바이오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업 다각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면서도 “신사업 발굴은 진행 중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내용은 아직 없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