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 전경. 사진=연합뉴스
2020년 5월 인천시는 인천국제공항을 대북 거점 공항으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외국인의 방북 환승을 담당할 뿐 아니라 북한 관광 및 수출입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인천시는 한국교통대 산학협력단에 이와 관련한 연구 용역을 맡겼다. 용역비는 1억 3500만 원이었다.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대북 비즈니스 플랫폼’에 300억 원 예산을 편성하는 추진안이 포함돼 있었다. 보고서는 대북 비즈니스 플랫폼을 언급하면서 “중국 단둥에 소재했던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사무실을 영종도에 유치해 원산지증명서 발급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보고서가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는 따로 있다. 정치권에서 보고서와 맥을 함께 하는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한 까닭이다. 박상혁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10명은 4월 26일 인천국제공항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과 한국공항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두 개정안엔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 업무에 ‘공항의 개발 및 운영 등 남·북한 간 항공산업 교류 및 협력을 위한 사업’을 명시했다.
야권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국민의힘 당직자는 “인천시의회 37개 의석 중 33개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하고 있으며, 시장도 민주당 소속”이라면서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을 띄우고 국회에서 화답한다면 못할 게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결국 더불어민주당이 이번 연구 용역 보고서대로 인천국제공항 운영 방안을 바꾸려는 절차에 착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2000년을 전후로 북한산 물품을 수입해 팔았던 한 기업가는 “이번에 논란이 된 연구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원산지증명서를 영종도에서 발급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기업가는 “북한이 중국 단둥에서 운영하는 원산지증명서 발급 사무실은 공신력이 없는 곳”이라면서 “이곳에서 중국산 물품을 북한산으로 둔갑시켜 한국으로 가져가려는 사업자들을 적잖이 봤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업자들이 중국산 물품을 북한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이유는 관세의 차이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잣을 예로 들어보면, 중국산 잣은 한국에 들어올 때 관세가 566% 정도다. 그런데 원산지를 북한으로 달고 있는 잣은 특례에 따라 관세를 감면받았다. 중국산 잣을 북한산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원산지증명서 도장을 찍어주는 사무실은 ‘도장비’를 받았다. 10톤 물량에 대한 원산지증명을 해주는 데에 1000달러를 받는 식이다. 사업자 입장에선 도장 받는 비용을 내는 게 관세 지출 비용보다 적으니 이렇게 불법적으로 원산지를 위조했던 셈이다.”
2016년 북한 농산물 원산지 점검에 나선 통일부 소속 공무원들. 사진=연합뉴스
한 중국 소식통은 “단둥에 위치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사무실은 사실상 원산지 세탁소 역할을 했었다”면서 “명목상 원산지만 바꿔주는 대가로 현금을 받아 챙기는 전형적인 북한판 창조경제라고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통은 “그러나 이 사무실은 2010년 이후 유명무실해졌고, 인적도 드물어졌다”면서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이명박 정부가 북한산 농·수산물 수입을 전면 제재하면서 중국산 물품을 북한산으로 둔갑시켜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했다.
일요신문은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사무실에서 원산지증명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발급받은 적이 있는 중국 현지 ‘따이공’ A 씨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따이공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농산물과 면세품을 소규모로 밀거래하는 보따리상을 일컫는다.
A 씨는 “단둥 사무실을 가면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사람이 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면서 “그 가방은 ‘휴대용 북한 정부’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 가방 속에 북한의 웬만한 정부 부처의 도장이 모두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A 씨는 “원산지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이야기를 해주겠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도장을 찍어주는 사무실 관계자가 ‘증명서가 필요한 물품이 어떤 농산물인지, 수산물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도장을 찍어주는 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한 합의를 마친다. 그러면 이 관계자가 가방을 하나 꺼낸다. 가방 속 내용물을 보고 처음엔 깜짝 놀랐다. 북한 정부 부처별 결재 도장이 다 들어 있었다. 농산물 원산지 증명을 할 땐 농림성, 수산물 원산지 증명을 할 땐 수산성 도장을 꺼낸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분명한 것은 중국산 물품이 북한산 물품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굉장히 짧다. 도장이 찍히는 찰나에 원산지가 바뀐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 사진=사진공동취재단
A 씨는 ‘인천국제공항 대북 교류 거점 연구’ 보고서 내용을 듣고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A 씨는 “중국산 물품의 원산지를 북한산으로 세탁하는 데 이용되는 시설을 왜 인천에 갖다 놓으려는 것이냐”고 했다. A 씨는 “만약 원산지증명서 발급 사무소를 인천으로 옮기게 되면, ‘휴대용 북한 정부’ 또한 한국에 둥지를 트는 것”이라면서 “그렇게 되면 ‘정체불명’ 농·수산물을 한국에서 북한산으로 확정해주는 도장을 찍게 된다. 농·수산물 세탁 작업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소식통은 천안함 폭침 이전 한국으로 들여오던 북한산 물품 대다수가 실제 북한에서 생산된 물품이 아닐 가능성에 주목했다. 소식통은 “북한은 사실상 농·수산물을 수출할 여력이 없는 국가”라면서 “북한 주민들조차 풍족하게 먹지 못하는 상황에 북한 지도부가 농·수산물을 바깥으로 돌릴 명분이 별로 없다”고 했다.
소식통은 “과거 한국에 들여오던 북한산 물품의 정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서 “석탄 등 자원이라면 몰라도 북한산 농·수산물이 한국에 수입된 사례 중엔 ‘원산지 세탁’을 거친 물품이 많을 것이라 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용역 보고서처럼 원산지증명서 발급을 한국에서 하게 되면 최근 논란이 된 중국산 김치 역시 북한산으로 둔갑해 통관이 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많은 문제점이 속출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원산지증명서는 생산국에서 발행하는 것”이라면서 “한국이 생산한 물품 원산지증명서를 뉴욕에서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일요신문은 관세청에 통상적인 원산지증명서 발급 절차를 문의했다. 관세청 측은 “원산지증명서는 일반적으로 생산국에서 발급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국제적으로도 FTA(자유무역협정) 협정문이나 법령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