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온 윤석열 전 검찰총장. 사진=최준필 기자
#먼산만 보는 윤석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3월 4일 검찰총장직을 던진 이후 각종 여론조사의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독보적인 보수야권의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파죽지세로 몸을 움직일 것 같던 윤석열 전 총장은 두 달 넘게 잠행만 하고 있다. 이따금 사람을 만난 사실이 전해졌지만, 대선주자로서 큰 발걸음은 전혀 옮기지 않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던지는 염려가 그의 행보를 신중 모드화한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관측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자신부터 돌아보면서 정치적 자산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빈주머니론’에 대한 대비다.
수사 말고 아는 게 뭐냐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그는 일단 ‘열공모드’에 들어갔다. 최근에는 거시경제 전문가인 권순우 한국자영업연구원장을 만나 최저임금 의제 등을 놓고 대화하는 등 꾸준히 전문가 조언을 구하고 있다.
보수 정치판 구조를 다 읽고 나서 움직이겠다는 계획성도 엿보인다. 윤 전 총장은 일단 4·7 재보궐 선거에서 제1야당 국민의힘이 승리한 것을 보면서, 차기 대선에서 보수야당이 정권을 탈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윤 전 총장은 오는 6월 11일 국민의힘 전당대회까지 보고 난 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새로 들어설 지도부의 면면과 여론의 평가까지 들어본 뒤, 국민의힘으로 들어갈지, 제3지대로 갈 것인지 자신의 행로를 최종 확정하고 정치 행보 시동을 걸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윤 전 총장을 잘 아는 국민의힘 한 현직 의원은 “윤 전 총장이 호탕한 성격이지만 수사를 오래 해본 사람이어서 매우 꼼꼼하다. 검사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의지, 그리고 능력을 재점검하고 정치판까지 다 분석한 뒤 나올 것”이라고 관측했다.
하지만 시간을 끌다 ‘여러 사람에게 묻고, 하나하나 따져보니 정치인으로서 내가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 많다’며 스스로 정계입문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 주변의 선후배 검사들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검사가 퇴임 후 바로 정치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재인 정부 서울중앙지검장에 검찰총장까지 했는데, 자신을 발탁해준 정부와 각을 세우는 것이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는 충고도 적잖다고 한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 후 ‘윤석열 전 총장이 야권 대선후보로 거론되는데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지금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윤 전 총장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며 “윤 총장이 정치를 염두에 두고, 정치할 생각을 하면서 검찰총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윤 전 총장도 부담을 느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현역 의원은 “윤 전 총장이 정치판에 나오겠다고 선언한 뒤, 문 대통령이 ‘우리 윤 전 총장이 이런 일들을 잘해주셨다’고 칭찬 발언을 해버린다면 보수진영은 ‘저 사람 우리편 맞나’라고 동요할 수 있다”며 “윤 전 총장은 적폐수사 등 보수야당과의 애증 관계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와도 애증 관계가 있어 과거사에 결국 발목 잡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에이스 투수’로 역할을 기대했던 윤 전 총장의 등판이 자꾸만 늦춰지면서, 국민의힘 속은 타들어간다. 윤 전 총장이 관망 끝에 정치를 포기할 경우 국민의힘은 내년 대선 농사를 사실상 망쳐버리게 된다. 특히 그의 오랜 잠행은 기존 국민의힘 잠룡들의 가치를 자꾸만 떨어뜨리는 악영향을 주고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이나 원희룡 제주지사, 당 밖에 있는 홍준표 무소속 의원도 강력한 대선주자인데, 윤 전 총장이 버티고 서있다 보니 마이너리그 투수처럼 보이는 형국이다.
국민의힘 한 다선 의원은 “전당대회를 거치고 새로운 당 지도부가 확정되면 그들에게 권위가 실려 담판 정치가 가능해진다. 6월 중에는 윤 전 총장과의 담판을 마무리하고 어찌됐든 결말을 지어야한다”고 지적했다.
5월 6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안철수, 빈집 입성 시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오세훈-안철수 야권 후보 단일화를 통해 민주당을 꺾고 압승을 거뒀다. 이 기세를 몰아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이 국민의힘 대문을 열고 통합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안 대표는 국민의힘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금은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대표는 지난 4월 2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야권 통합 시기와 관련해 “내년 3월 전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밝혔다. 윤석열 전 총장의 야권 합류 등 각종 변수를 고려할 때 국민의힘과의 합당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속내를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도 풀이됐다.
실제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간 ‘통합 전당대회’ 논의는 5월초 무산됐다. 국민의힘은 안 대표가 대선 출마를 위한 독자 행보를 시작했기에 당 대 당 통합은 어려워졌고, 내년 3월 대선 직전까지 대선후보 단일화를 두고 그와의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안 대표는 지난해 12월 20일 서울시장 출마 기자회견에서 “대선을 포기하고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했다”고 말했지만,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는 대선 출마 문제를 거론하면서 “연출 주연 조연 어떤 역할이든 하겠다”고 비유적 언급을 반복하고 있다.
안 대표는 윤 전 총장 외에는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대선주자가 없는 국민의힘이 자신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예측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난 재보선 승리가 야권 후보 단일화 덕분이며, 안 대표가 단일화의 일등공신이기에 명분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국민의당 내부 생각이다.
바른미래당에 몸담아본 경험이 있는 국민의힘 한 의원 측 관계자는 “안 대표가 지금 국민의힘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국민의힘과 지근거리에서 단일 후보로서 기회를 보는 것 같다. 마땅한 대선주자가 없는 국민의힘의 대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와 안방 차지를 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퇴임 소감을 밝히고 있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김종인, 대문 밖에서 원격조종?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4·7 재보선 승리 직후 국민의힘을 떠났다. 대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자신이 이끌던 국민의힘을 향해 ‘아사리판’이라고 하는 등 연일 독설을 쏟아냈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김종인식 원격조종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강한 발언을 통해 당을 자신의 훈수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현역 의원은 “빤하지 않느냐. 사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재보선 승리 직후 바로 나가야했으니 인간적으로 섭섭함도 있을 것”이라며 “김 전 위원장은 국민의힘을 자신의 방식대로 만들고 싶다는 미련이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그 미련을 현실화시킬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특히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퇴임 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차라리 아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면 초선 의원을 (당 대표로) 내세우는 것도 방법”이라고 밝혔다. 초선 당권주자인 김웅 의원에게 김 전 위원장의 마음이 가있고, 김 의원에게 주목도가 높아지는 것도 김 전 위원장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많다.
김 전 위원장은 초선 유일한 당권주자인 김웅 의원을 5월 7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김 전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김 의원에게 “누군가의 꼬붕(부하)이 되지 말고 자기만의 정치를 하라” “더 세게 붙어라”고 하는 등 약 40분간 조언을 해줬다.
“김 전 위원장이 퇴임하기 전 자신이 눈여겨본 초선들을 만났고 당권 도전을 권유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이들을 통해 뭔가 해보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국민의힘이 이제 새 지도부를 갖추고 재출발하는데 당 밖 목소리가 과대평가돼 당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당의 대선 승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의 걱정이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