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영풍빌딩 전경. 사진=박정훈 기자
#장세준 대표의 첫 성적표 외화내빈?
영풍그룹 장씨 집안은 3세 승계를 사실상 마무리한 상태다. 1949년 고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창업한 영풍그룹은 현재까지도 두 집안에서 공동 경영을 해오고 있다. 3세 경영인 장세준 대표는 그룹 지주사인 (주)영풍 지분을 16.89% 보유한 최대주주다. 아버지인 장형진 고문은 지난해 6월과 9월에 걸쳐서 (주)영풍 지분 11.5% 중 9.18%를 씨케이에 넘겼다. 씨케이는 장세준 대표를 포함한 장씨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지난해 3월 장세준 대표이사는 4년 만에 단독으로 영풍그룹의 자회사 코리아써키트 수장으로 올라섰다. 앞서 2016년 코리아써키트는 최대주주인 장세준 대표를 신규 선임했다. 이광원 대표 체제에서 이광원·장세준 각자 대표 체제로 변경된 것이다. 2017년에는 박형건·장세준 각자 대표, 2018년 박형건 단독 대표, 2019년 서정호 단독 대표 체제로 회사를 경영해왔다.
지난해 코리아써키트는 코로나19 수혜 기업으로 꼽혔다. 코리아써키트의 주력 사업은 PCB 제조·판매다. 스마트폰, 메모리 모듈, LCD, 반도체 등에 사용되는 PCB를 주로 생산한다. 지난해 코로나19 영향으로 반도체 업황이 호조를 보였고, 강력한 경쟁사 삼성전기가 스마트폰 주기판(HDI) 사업을 중단하면서 반사 이익까지 예상됐다.
지난해 초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삼성전기의 사업 중단으로 프리미엄급 스마트폰향 HDI에서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갖춘 코리아써키트가 점유율 상승과 더불어 반사이익을 볼 수 있고, 반도체용 PCB의 매출 호조 등으로 올해 턴어라운드가 가능하다”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6.8%, 영업이익은 170.6% 증가한 332억 원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장세준 대표의 첫 성적표는 시장의 기대치를 밑돌았다. 지난해 코리아써키트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6.01% 상승한 9021억 원이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31% 하락한 134억 원으로 집계됐다. 당기순손실은 117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외형은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지만, 실속은 기대 이하를 기록한 셈이다.
장세준 대표의 경영 능력을 두고 뒷말이 나온다. 앞서 장세준 대표는 2009년 시그네틱스 전무로 입사해 그룹 경영에 참여한 뒤 지난 2013~2015년 영풍전자 대표를 역임했다. 문제는 대표 취임 이후 영풍전자 실적이 매년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2012년 매출액 4431억 원, 영업이익 579억 원으로 견실한 실적을 냈다. 하지만 2013년부터 실적이 고꾸라지더니 2015년 매출액(2030억 원)은 ‘반토막’이 났고, 영업손실은 201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결국 2016년 3월 장세준 대표는 코리아써키트로 자리를 옮겼고, 영풍전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영풍전자의 실적은 반등하기 시작했다. 2017년 매출액 6122억 원, 영업이익 608억 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지난해 영풍전자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7607억 원, 339억 원을 기록했다.
서울 강남구 영풍빌딩 전경. 사진=박정훈 기자
#휴식 시간 확대, 결국은 비용절감?
이런 가운데 장세준 대표가 코리아써키트 비용 절감을 위해 직원들 연봉을 일방적으로 삭감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초 사측은 생산직 직원들에게 근로시간을 변경한다고 공지했다. 식사시간 연장, 조식 신설 등을 통해 휴식시간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존의 근무시간이던 5시 50분~6시 30분과 6시 30분~7시 10분은 식사시간이 됐다. 여기에 중식, 석식, 야식 시간도 10분씩 늘어났다. 이를 토대로 생산직 직원들은 같은 달 말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일부 직원들은 휴식시간을 확대하면 임금이 줄어든다며 부당한 계약이라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수당이 지급되던 근무시간을 식사시간으로 포함시켜 결국 임금이 삭감됐다는 것. 코리아써키트 생산직은 시급제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금은 기본급, 연장수당, 야근수당, 성과급 등으로 구성됐다. 4일 주간, 2일 휴무, 4일 야간 순서대로 3조 2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주간에는 2.5시간을 시급의 1.5배로, 야간에는 3시간을 시급의 2배로 연장수당이 지급된다. 휴무나 공휴일에 근무한다면 특근 수당이 지급된다.
코리아써키트 한 직원은 “이번 휴식시간 확대는 공장 대표들과 본사 직원들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 결정된 것”이라며 “직원들에게 어떤 상의도 없이 휴식시간을 확대한다고 홍보하면서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측의 행태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연이어 퇴사하면서 업무 강도는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일부 직원은 연봉이 줄어들자 퇴사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근로계약서 체결 전후로 최소 5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다는 것이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코리아써키트의 휴식시간 확대는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근로기준법 제94조에 따르면 사측은 취업규칙을 작성하거나 변경할 때 과반수의 노동자로 조직된 노조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노조가 없다면 노동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특히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엔 노동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와 관련,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근로시간이 단축되면서 전체 급여가 줄어든 것은 불리한 변경에 해당될 수 있다”며 “이때 개별 근로계약을 맺는 것은 효력이 없고, 노동자 과반수의 집단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풍그룹 관계자는 “코리아써키트가 내놓을 별다른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