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나하시 에리코 씨(59) |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1년 동안 누구보다 전전긍긍했을 에리코 씨의 세 딸들은 어떤 심경일까. 일본 후지사와 시에 살고 있는 장녀 다나하시 마가토 씨(38)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일본 여성 관광객 실종사건의 전모 및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를 들어봤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한국 분들이 어머니 찾기에 힘써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1월 5일 기자와 통화한 장녀 마가토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국 내에서 보여주고 있는 관심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실종된 후 두 동생들과 함께 최종 목격자의 진술이 있었던 강릉 주문진 일대를 한 달에 한번꼴로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모 일간지를 통해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아온 점 때문에 자살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된 점에 대해선 사실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마가토 씨는 자살이 아닌 이유에 대해 “이번 여행은 세 딸들이 신년 깜짝 선물로 여행자금을 모아 준비한 것이었다. 아이처럼 기뻐하시며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친구 분들에게 자랑하셨다”고 말했다. 실제로 에리코 씨가 묵었던 청담동 호텔에는 그녀의 짐 가방은 물론 평소 쓰던 일기장, 노트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가토 씨는 “노트에는 평소처럼 한국어 연습을 한 흔적밖엔 없었고, 자살의 징후는 전혀 없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떠난 모양새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에리코 씨가 남긴 노트에는 한국어로 ‘류시원이 보고 싶다. 그립다’는 내용의 문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마가토 씨는 기상악화로 인한 실족사 가능성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어머니는 후지사와 시에서 평생을 사셨다. 후지사와 시는 해변까지 10분 거리도 안된다. 바다 수영에 능숙하셨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족사를 하실 만큼 바다 기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분도 아니다”고 말했다.
실종 수사가 장기화되자 딸들은 직접 한국을 찾아 어머니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15일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물론 류시원 소속사 직원들도 전부 휴가를 내고 에리코 씨의 소식을 수소문했다고 한다. 류시원 씨 역시 세 딸들에게 자필 편지를 보내 우려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목격자 진술이 어긋나는 등 수사는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최종 실종 장소가 바뀐 것도 수사를 장기화시킨 이유로 작용했다. 수사 초기 강릉경찰서에서는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증언을 토대로 “저녁 8시 10분발 고속버스를 타서 11시 10분경 서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해 사건을 에리코 씨가 묵고 있던 호텔 근처인 강남 경찰서로 넘겼다.
하지만 이후 또 다른 진술로 인해 운전기사가 목격한 사람은 에리코 씨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거나 도착했어야 할 시간인 저녁 9시경에 에리코 씨가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강릉 주문진 항에 있는 하얀 등대를 찍은 사진과 류시원 씨의 상반신 사진을 전송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강릉을 떠나지 않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다시 강릉경찰서에서 사건을 넘겨받아 수색을 시작했지만 사건 발생 후 두세 달이 지난 상황이라 목격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에리코 씨가 당초 춘천 여행을 하려다 강릉으로 행선지를 바꾼 이유를 둘러싼 의구심도 증폭됐다. 수사팀도 행선지 변경 이유에서 실종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에리코 씨는 춘천과 강릉 두 곳 모두 방문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마가토 씨는 “어머니는 <겨울연가>(배용준 출연작) 촬영지보다는 류시원 씨가 출연한 드라마 <진실>의 촬영지인 강릉 주문진으로 가고 싶어 하셨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에리코 씨는 일본에 있는 절친에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기도 했다. 춘천 터미널에 도착한 에리코 씨는 “역시 춘천은 재미가 없어. 강릉으로 갈거야”라는 메시지를 전송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족들은 에리코 씨가 길을 잃거나 소매치기를 당했을 가능성도 낮게 보고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에리코 씨는 2003년부터 매년 한두 번꼴로 한국을 찾았다. 남편과 줄곧 동반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나 2005년 남편을 잃은 후에는 반년에 한 번꼴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기간도 짧게는 4박5일, 길게는 1~2주 정도의 여행이었다. 가족들의 주장대로라면 혼자 여행을 훌쩍 떠나는데도 스스럼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에서 류시원 팬이나 친구들과 만나서 여행하는 것도 꺼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그만큼 한국 드라마와 류시원 씨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마가토 씨는 “어머니는 류시원 씨가 출연한 드라마 DVD를 모두 소장하시는 것은 물론 이미 본 드라마의 재방송 일정도 모두 챙겨서 볼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2000년경 방영한 MBC 드라마 <진실>은 에리코 씨가 감명 깊게 본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 강릉시 주문진은 여주인공이었던 최지우 씨가 류시원 씨를 피해 잠적했던 장소로 등장했다. 결국 최지우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류시원은 주문진 붉은 등대 앞에서 최지우를 찾게 된다.
공교롭게도 에리코 씨는 친구에게 바로 그 붉은 등대를 보러 갈 것이라고 한 후 붉은 등대가 아닌 10㎞ 떨어진 부근의 흰 등대 사진을 지인에게 전송한 후 소식이 끊겼다. 그후 인근 횟집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등장하며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가능성이 다시 제기됐지만 세 딸들은 어머니가 평소 우울증을 앓거나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이후 불면증 증상을 앓아 잠시 수면제를 복용하긴 했지만 특유의 건강한 성격으로 극복해 왔다는 것이다.
마가토 씨는 “어머니는 자살하실 분이 아니다. 어떤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보신 분이 있다면 꼭 제보를 부탁드린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