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5월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앤드류스 공군기지에 도착, 환영 인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면은 여권 대선 주자들에겐 일종의 계륵이다. 중도층 확장이 과제인 상위권 주자일수록 사면 이슈는 손댈수록 손해다. 국민 통합이나 경제 살리기 차원에서 사면론을 꺼냈다가는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공고했던 이낙연 전 대표 지지율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논의 하나로 꺼졌다.
반면 후발 주자들에겐 자신의 선명성이나 정체성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다. 여권에서 가장 먼저 대선 도전을 선언한 박용진 의원과 원조 친노(친노무현) 이광재 의원이 이재용 부회장 사면을 놓고 ‘찬반 깃발’을 꽂은 것도 인지도를 높이려는 전략과 무관치 않다.
눈여겨볼 대목은 사면 정국의 흐름과 범위 확장이다. 애초 사면론은 두 전직 대통령에 한정됐다. 이낙연 전 대표 제안도 MB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논의였다. 하지만 백신 대란 과정에서 ‘반도체 지렛대론’이 부상하면서 이재용 부회장 사면 논의로 범위가 확장됐다. 백신 물량 확보 과정에서 ‘반도체 딜’을 활용하자는 게 핵심이다.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논의 명분이 국민 통합에 국한된다면, 이재용 부회장 사면 논의는 플러스알파(+α)로 ‘경제 살리기’까지 가미됐다. 이슈 폭발력 측면과 우선순위 과제에서 이재용 부회장 사면이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을 압도했다. 이른바 ‘선 이재용-후 MB·박근혜’로 이슈의 중요도가 뒤바뀐 셈이다.
청와대 기류에도 변화가 감지됐다. 결정타는 문 대통령의 5월 10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반도체 경쟁력과 형평성 등을 고려해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두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해서도 “국민 공감대 등을 생각하면서 판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라고 선을 그은 문 대통령의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과 비교하면, 진전된 발언이다. 친문 핵심 관계자도 “확실히 다른 기류”라고 말했다.
정부에선 가석방 요건 완화도 언급됐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5월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가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현행 법무부 예규상 복역률 65%를 채워야 가능한 가석방 요건을 60%로 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2년 6개월 선고받은 이 부회장은 오는 7월 말께 형량의 60%를 채운다.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을 놓고 사실상 사면 판을 깔기 위한 포석이란 분석이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임준선 기자
그간 청와대 인사들은 사면 이슈가 나올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권 수뇌부 중 일부는 이들 사면에 관해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간의 공식 입장은 “논의한 바 없다”였다. 여권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청와대 내부에선 “이 부회장 사면 논의에 물꼬를 트면 두 전직 대통령 사면도 공론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재용 부회장 사면 논의가 본격화하면 MB·박근혜 사면의 방어막도 뚫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친문 강경파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대통령 권한인 사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여권 인사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일각에선 원 포인트 사면이 아닌 ‘트리플(MB·박근혜·이재용) 사면’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사면 논의의 문을 닫지 않은 만큼, 당장 오는 8·15 광복절부터 연말까지 정치권의 눈은 문 대통령에게 쏠릴 것으로 보인다.
관전 포인트는 여권 ‘빅 3’을 비롯한 대권 잠룡들의 스탠스다. 이재용 부회장 사면 관련 입장을 보면, △신중파(이재명·이낙연) △반대파(정세균·박용진) △찬성파(이광재)로 나뉜다. 다만 신중파와 반대파 주자 간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선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경우 ‘입장 보류’에 가깝다. 그는 5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비주거용부동산 공평과세’ 토론회 직후 이 부회장 사면론에 대해 “통치행위에 가까운 매우 정무적이고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라며 “나 같은 사람이 의견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문 대통령에게 공을 떠넘긴 셈이다. 이 지사를 지지하는 진보 지지층 이탈을 우려한 침묵으로 분석된다.
이낙연 전 대표는 ‘온전한 신중파’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이 지사와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에게 공을 넘겼지만, 입장 보류보다는 선 긋기에 가깝다. 이 전 대표는 올해 초 두 전직 대통령 사면론 제기 직후 지지율이 급속히 빠졌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지난해 12월 1주 차(1∼3일 조사, 4일 발표)에서 이 전 대표의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는 16%였다. 하지만 2월 1주 차(2∼4일 조사, 5일 발표) 조사에선 10%로 급락했다.
이후 이 전 대표는 호남의 심장 광주에서 MB·박근혜 사면론 발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는 5월 16일 민주당 광주시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뜻과 촛불의 정신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잘못을 사과드린다”며 “그 후로 저는 아픈 성찰을 계속했고, 많이 깨우쳤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전 대표가 사면론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사면론 제기에 사과한 이 전 대표는 민주주의 성지 광주에서 개헌을 띄웠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5월 12일 한 행사장에 참석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분권형 개헌론을 연일 제기, 여의도 안팎에선 친문발 개헌으로 이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헌 열차에 탄 정 전 총리는 정치권 사면 논의에 대해 ‘사실상 반대’ 뜻을 밝혔다. 그는 5월 17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재용 부회장 사면론에 대해 “아직 공감대가 다 마련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정 전 총리가 기업인(쌍용그룹 상무이사)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반응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권 한 관계자는 “사면 이슈를 끌고 갈 실익이 없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율 5% 돌파가 1차 목표인 정 전 총리가 집토끼 이탈이 불가피한 사면론을 제기하는 것은 패착 중 패착으로 분석된다.
정 전 총리는 대선 정국 초반, 친문 지지층 잡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정 전 총리가 검찰을 향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라며 검찰 개혁을 외친 것이나, 호남을 찾아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을 약속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다만 정 전 총리와는 달리, 측근들 사이에선 “이재용 부회장 사면이 강력히 필요하다(이원욱)” 등 찬성론이 나오고 있다.
여권 후발 주자들은 사면론 찬반 이슈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개혁 성향 박용진 의원은 “사회 지도층일수록 법을 어겨선 안 된다”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20대 국회 당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다. 진보신당 부대표 출신인 그는 평소 재벌 개혁에 대해서도 강한 선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광재 의원은 이 부회장 역할이 있다는 전제로 “사면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때”라고 했다. 여권 대선 주자 중 이재용 부회장 사면의 필요성을 공식 언급한 이는 이 의원이 처음이다. 이 의원은 “삼성 장학생이라고 비판받겠지만…”이라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 한 보좌관은 “표 셈법을 떠나서 이 의원의 평소 지론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사면 정국의 변수는 역시 문 대통령 지지율이다. 특별 사면이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문 대통령의 최종 선택은 지지율과 연동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경우 국민 통합을 고리로 특사를 단행, 국면전환을 꾀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역대 대통령들도 사면론을 국면전환용 카드로 종종 썼다. 차기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사면 카드는 판을 바꿀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