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박원순 시장에 관한 글을 고교 동창회보에 보냈었다.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써 오던 칼럼의 하나였다. 칼럼이 중단됐다. 좌파에 대한 글을 동창회보에 싣기 곤란하다는 통보였다. 나는 좌우의 정확한 사상을 모른다. 그냥 양심에 따라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쪽을 따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을 기록한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읽었다. 그가 진보를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한 내용이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이론이 뭐냐면 버스 딱 세워놓고 몽둥이 들고 올라가서 ‘차주 내려와’ 하면서 패고 ‘기사 내려’ 하면서 패고 그들을 확 끌어내 버리고 ‘우리가 몰고 가자’하는 거죠. 그런데 진보는 조금 달라요. ‘차가 좀 비좁나? 그래도 뭐 다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인데 우리도 좀 타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못 타게 하니까 ‘왜 못 타 인마, 김해 사람은 손님 아니야?’라면서 올라타는 거죠. 요새 진보는 나도 좀 타고 가자 그 정도거든요. 버스가 운행하는데도 ‘왜 니들끼리 코스를 마음대로 정하고 그래? 나도 의논하는 데 한자리 끼자’ 이런 게 진보예요. 그러면 보수는 뭘까. ‘야 이 차가 비좁다. 손님 태우지 마라. 늦는다’ 이거죠. 내가 어릴 때 부산서 출발해 김해에 오면 김해정류장에서 늘 그런 싸움을 했거든.”
“진보의 가치는 뭐냐 함께 살자 이겁니다. 버스로 말하면 ‘쟤들도 태워줘라’ 이겁니다. 사람들이 버스 뒤로 좀 들어가면 얼마든지 더 탈 수 있는데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안 비켜주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보수주의잡니다. 그 차에서 ‘차장, 오늘 어렵더라도 같이 타고 가야지 그 사람들도 가서 제사 지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해주는 손님이 진보주의자예요.”
“그런 사람 중에서 ‘뒤로 좀 들어가세요’라고 사람들을 밀어주고 차 문을 열어 타게 해 주는 사람은 그래도 더 나은 진보이구요. 이게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리하고도 맞는 거 아닙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연대 정신이죠. 논리적으로 점잖게 말하면 공존의 지혜구요.”
그가 말하는 보수주의자가 그렇게 이기주의만 있는 것일까. 그 근원이 무엇일까. 400년 전 영국 런던에 바짝 야위고 병으로 몸이 약한 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뒷골목 초라한 집에 가난하게 살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큰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 사상이란 인간은 대단히 가치 있는 존재이고 또 자유로운 개인은 국가보다 귀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런 사상이 사회에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초라한 자기의 방에서 그의 생각을 책으로 썼다. 그가 존 로크이고 그 책은 민주주의의 고전이 됐다.
전체주의 사상보다 그렇게 ‘인간 위주’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민족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하는 병영국가의 한 부품으로 성장했다.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였다. 그래도 군 복무를 전방에서 남들 두 배 이상 하고 평생 세금도 낼 만큼 냈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무슨 주의라는 어설픈 관념으로 인간을 따돌리거나 정신적 감옥에 넣지 말고 인간 위주의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버스에 타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을 태워주려고 애쓰는 마음은 진보의 독점물이 아니고 인간본질의 따뜻함이다. 진보, 보수라는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그래서 노무현의 말 중에 예수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경제보다 더 귀한 게 국민의 정신이라는 생각이다. 국민의 정신이 경박할 때 열등한 나라로 전락한다. 좋은 정신만 있으면 그 나라는 쇠망하지 않는다. 나라의 흥망은 그 국민의 평소 수양에 달려 있기도 하다. 사회의 참 모습은 이를 형성하고 있는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개혁도 먼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편 가르기를 하지 말고 ‘인간 위주’의 제3의 길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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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