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추나무로 조각한 당대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산수문음각’안경집. 사진제공=한빛안경박물관 이정수 관장 |
젊은 세대는 안경집이 우리 전통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남아 있는 제일 오래 된 안경과 안경집은 학봉 김성일(1538~1596)의 것이다. 1580년대에 만들어졌다. 조선후기 언어학자 황윤석의 <이재전서>로 추정해보면 안경의 기원은 임진왜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0년께 독자적으로 안경을 제작했고 순조(1790~1834) 때 유행하기 시작했다. 영조 때는 조금 더 널리 사용됐고 정조는 직접 안경을 썼다.
안경은 처음에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도포자락 속에 넣어 다녔다고 한다. 안경집을 매는 끈이 없었다. 유교도 안경 문화에 영향을 줬다. 안경을 쓸 때, 장유유서의 질서와 양반ㆍ평민의 구분을 강조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젊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지체가 높은 어른 앞에서는 안경을 쓰지 못한다는 ’안경 예절’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순종은 지독한 근시였는데도 아버지인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안경 착용은 자랑스럽게 여겨지게 되었다. 도포자락에서 해방됐고 허리춤에 매는 것이 유행했다. 조선 후기의 시인 이서구(1754~1825)는 <안경의 내력>이란 글에서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은 상비약을 간직하기 위한 약주머니, 호패, 이쑤시개 통, 먹물 통을 찼으며 화려한 안경집을 하나 더 찼다. 그래서 허리띠에는 주렁주렁 달리는 것이 많아서 마치 성황당 대추나무 같았다. 이 가운데서 안경집이 제일 사치스러웠다.” 화원이 도안을 하고, 조각사가 조각한 뒤, 칠방에서 칠한 것도 있었다. 왕족도 한껏 멋을 부린 안경집을 차고 다녔다.
안경집은 보통 나무, 종이, 대모(玳瑁·거북이 등껍질), 가죽 등 재료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어피(魚皮), 즉 상어 껍질로 만들었다. 어피는 비늘 때문에 아주 거칠지만 숫돌에 갈면 매끄러워지며 작은 물방울무늬가 나타난다. 또한 매끄럽게 갈아내면 투명해지는데 여기에 붉은색이나 청색을 칠해서 사용했다.
조선 중기에 나타난 안경집은 피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를 파서 본체를 만들고 옻칠이나 기름칠을 해서 사용했다. 대추나무를 조각해 만들기도 했다.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만들거나, 가늘게 쪼갠 뒤 엮어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학봉 김성일의 안경집은 가벼운 피나무로 만들었다. 겉은 옻칠을 하되 속은 그대로 두어 우리의 전통 공예품과 같은 처리기법을 썼다.
종이 안경집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고 알려져 있다. 종이를 겹쳐서 바른 뒤 옻칠을 하거나, 종이를 가늘게 잘라 꼬고, 엮어서 만들었다. 뼈대는 종이로 만들고 명주, 모시, 삼베로 감싼 뒤 옻칠을 하거나 감 물(덜 익은 감에서 나는 떫은 즙), 쪽 물(쪽에서 얻는 짙푸른 물감)을 들인 것도 있다. 우리나라 닥나무 한지는 질겨서 수명이 길기 때문에 많이 애용되었다.
전통 안경집은 남자 노인이 주로 사용했다. 그래서 장수를 상징하는 문양을 장식으로 많이 새겼다. 사슴, 대나무, 학, 거북이, 해, 구름, 바위, 물결, 불로초, 대나무, 소나무 등을 전부 넣거나, 일부를 새겼다. 십장생(十長生) 외에 사군자, 만자문, 연속 꽃무늬, 신선도, 화조, 포도 등의 문양도 넣었다. 이렇게 만든 안경집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공예품으로 대접받았다. 조선 말기에는 왕실에서 수를 놓는 상궁을 두어 안경집을 만들게 했다. 이때 비단 위에 산호, 유리구슬 등을 실에 꿰어 수를 놓았다.
안경집의 형태는 긴 타원형이 많았고, 직사각형ㆍ원형도 있었다.
안경집은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예컨대 은ㆍ칠보 안경집 노리개는 아기의 첫돌 때 달아주며 눈병에 걸리지 않기를 기원했다.
우리 민족은 400년 넘게 안경집을 사용했다. 이런 안경집을 스스로 재발견하고, 널리 사용하면서, 서양식 안경집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때 새로운 문화 전통이 생길 수 있다. 한국적 문화정체성은 그래야 생긴다.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