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는 내 인생의 전부, 원 없이 해 후회 없어…전창진 감독, 아버지 같은 분”
‘조선의 슈터’ 조성민(38)이 은퇴를 선언했다. 2006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8순위로 부산 KTF(현 부산 kt)에 지명됐던 그는 2017년 트레이드를 통해 창원 LG 유니폼을 입었고, 지난 시즌을 끝으로 13시즌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은메달,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앞장섰던 조성민은 통산 13시즌 동안 550경기에 출전해 5390점, 3점슛 성공률 39%를 기록했다. 또 자유투 56개 연속 성공 신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멋진 엔딩을 위해 힘든 재활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지금 마침표를 찍는 이유가 무엇일까. LG 구단의 공식 은퇴 발표가 있던 다음 날인 25일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위해 대구에서 올라온 조성민을 만났다.
―은퇴 시기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한 걸로 알고 있다. 왜 ‘지금’인 건가.
“비시즌이 시작되면서 계속 고민했었다. 부산 kt에서 트레이드돼 LG로 오면서 통합 우승이란 목표를 갖고 선수 생활을 이어갔는데 자꾸 벽에 부딪히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이는 한 살 두 살 먹어가고, 꼬인 매듭은 풀리지 않다 보니 지쳤던 것 같다. 그러다 LG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고, 다시 FA(자유계약) 자격을 얻었지만 FA보다는 은퇴 쪽으로 기우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은퇴 여부를 놓고 아내보다는 장인어른과 먼저 상의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으니 이제 쉬어도 되겠다며 격려해주셨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은퇴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비시즌이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기뻐하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누가 가장 기뻐한 건가.
“딸, 을하다(웃음). 아빠가 더 이상 농구 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하니까 박수 치며 좋아하더라. 자기랑 놀아줄 수 있게 됐다면서. 딸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동안 농구 한다는 이유로 가정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를 결정한 다음 후회한 적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 아쉽거나 섭섭한 마음이 하나도 안 들었다. 그만큼 농구를 원 없이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기자님과 이전에 인터뷰했던 내용이 떠오른다. 부산 kt 시절이었는데 당시 내가 서른여섯 살에 은퇴하고 싶다고 말한 부분이다.”
―그때도 궁금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물어보겠다. 왜 서른여섯 살에 은퇴하겠다고 이야기했던 건가.
“철이 없었다(웃음). 그 나이가 되면 kt와 계약 만료였다. 서른여섯 살에 은퇴해서 지도자 생활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LG로 트레이드 되었고, 갑자기 우승팀 전력에 합류하다 보니 내면의 열정들이 깨어나면서 1, 2년 안에 통합 우승을 이루겠다며 에너지를 뿜어댔다. 공교롭게 (김)종규를 비롯해 나마저 부상을 당하고 감독님이 이듬해 바뀌면서(김진→현주엽) 힘이 많이 떨어졌다.”
―2017년 1월 31일 트레이드 통보를 받고 그날 바로 짐을 싸 이천 LG 선수단 숙소에 합류했을 때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LG 숙소가 마치 대표팀 숙소인 것 같다고 말한 내용이 기억난다.
“그때 이천 숙소에서 만난 선수들이 김종규, 김시래 등 대표팀에서 만난 후배들이었다. 후배들 얼굴을 보니 트레이드돼서 왔다는 생각보다 대표팀에 합류한 기분이 들더라. 그래서 아마 인터뷰할 때 그런 이야기를 전한 것 같다.”
―창원 LG에서 보낸 시간들에 회한이 많은 것 같다.
“시작은 좋았지만 내 운이 다했던 건지 잘 풀리지 않았다. 나한테 기대를 많이 했을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잘하고 싶은데 자꾸 안 되니까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사람 일이란 게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절감한 시간들이었다.”
조성민은 창원 LG에서 보낸 시간들을 돌이켜 볼수록 자신에 대한 자책이 커진다고 말한다. 고액 연봉 선수로서 책임감을 갖고 팀을 잘 이끌어갔어야 했는지, 아니면 후배들을 뒷받침하면서 밀고 갔어야 했는지 여전히 헷갈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성민은 LG 이천 숙소에서 야구 최동수 코치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어느 날 최 코치님 눈에 내가 많이 힘들어 보였는지 이런 조언을 해주시더라. 나한테 항상 ‘성민 씨’라고 부르셨는데 ‘성민 씨, 선수 생활했을 때 코치 행동 중 제일 보기 싫었던 것만 코치 된 후 하지 않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서로 얼굴 보고 빵 터졌던 순간이었다. 내가 은퇴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고, 은퇴 후 지도자를 꿈꾼다는 것도 알고 계신 터라 내게 그런 내용의 조언을 해주신 것 같다.”
―선수 생활 하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도자들은 어떤 유형이었는지 궁금하다.
“선수들과 마음의 문을 열고 깊은 대화를 나눴고, 잘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내가 언제 그랬어?’하면서 발을 빼는 모습을 봤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지도자는 선수한테 울타리가 돼줘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이 마음을 열 수 있다.”
―조성민의 농구 인생에서 마음의 문을 크게 연 지도자가 전주 KCC 전창진 감독 아닌가.
“가장 기억에 남을 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앞섰는데 함께 생활하면서 감독님이야말로 정말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라는 걸 느낀 적이 많았다. 한번은 훈련 중 부모님 산소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감독님한테 미리 허락을 받고 훈련을 거른 채 산소로 향하는데 감독님이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다. 훈련 못한 거 걱정하지 말고 부모님 잘 모시고 오라고, 운전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지금도 그 문자를 떠올리면 울컥하는 감정이 들 정도로 내게 따뜻한 위로와 위안으로 다가왔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감독님한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지도자도 나한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 없었다. 감독님이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감독님을 믿고 따르게 됐다.”
―그 후로 전창진 감독과는 감독과 선수 이상의 관계가 형성된 건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감독과 선수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신뢰인데 감독님과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형성됐다. 한번은 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감독님이 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내가 부진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는데 속 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하자 감독님이 정신 차리라며 혼을 내시더라. 자신이 언젠가는 팀을 떠날 수 있는데 이렇게 농구 하면 너를 보호해줄 지도자가 없을 거라며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을 치셨다. 다음 날 원주 동부하고 경기가 있는데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팀을 떠날 수 있다는 감독님의 말씀이 계속 내 마음을 맴돌았다. 다음날 동부와의 경기에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포텐을 터트렸고 27득점을 올렸다. 경기 후 수훈 선수로 뽑혀 인터뷰를 마친 다음 감독님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데 감독님이 날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민아, 농구는 그렇게 하는 거야 인마. 오늘 진짜 잘했어.’ 순간 눈물을 참다가 콧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슬럼프를 그렇게 이겨냈다.”
조성민은 전창진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로 농구계를 떠나 있다가 전주 KCC 사령탑으로 복귀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감독님이 복귀할 당시 개인적으로 나는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감독님이 다시 농구계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체만으로도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으니까. 나한테 전창진 감독님은 지도자였고, 농구 선배님이셨고, 인생의 스승이었고,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전 감독과 조성민의 인연은 종종 선수한테 어려운 숙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농구계에선 두 사람의 인연을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지만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보낸 이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성민은 자신이 ‘조선의 슈터’로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 감독과 함께했던 부산 kt 시절이 있다고 말한다.
―조성민의 농구 인생을 정리하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이다. ‘나한테 농구란?’
“가족 외에 내 인생의 전부였다. 은퇴를 결심하고 하루는 내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온전히 농구만 알고 달려온 기억밖에 없더라. 비시즌 때 가족들이 여행을 가자고 해도 쉽게 ‘오케이’하지 못했다. 선수는 비시즌에도 훈련으로 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 편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루 이틀 늦게 해도 되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10년 넘게 농구만 보고 내달렸다. 당분간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농구 유전자는 1도 없는 딸이 다행히 엄마(플루티스트)를 닮아 첼로를 시작했다. 비로소 아빠 노릇을 하게 돼 설레는 마음이 크다(웃음).”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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