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숱한 검찰수사를 받고도 살아남았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도 결국 ‘박연차 저주’는 넘지 못했다. |
이 전 지사는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 민주당의 불모지였던 강원도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히 도지사에 당선됐지만 당선 직후 진행된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도지사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됐었다. 이후 9월 2일 헌법재판소가 이 전 지사의 ‘직무정지’ 족쇄를 풀어줌으로써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그는 사면복권이 이뤄지지 않는 한 정치적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23세 때인 1988년 노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최대 위기상황이다. 참여정부 시절 ‘우광재’로 통하며 핵심 실세로 군림해 온 이 전 지사는 그동안 여섯 번의 검찰 수사와 특검에서도 오뚝이처럼 살아남았다. 하지만 불사조 같았던 이 전 지사도 결국 ‘박연차 저주’는 넘지 못했다.
이 전 지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및 굴곡진 23년 정치인생 스토리를 되짚어 봤다.
“참슬프다. 도지사직을 잃어서 슬픈 게 아니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눈물이 난다.”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도지사직을 잃은 이 전 지사는 1월 27일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밝힌 소회다. 지난해 9월 헌재의 결정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갔던 이 전 지사는 대법원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검찰과 이 전 지사의 모진 악연도 결국 검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23세에 정치에 입문해 23년간 결코 순탄치 않은 정치역정을 경험한 이 전 지사는 이제 기약할 수 없는 정치 부랑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3년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한 이 전 지사는 동아리 활동과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 전 지사는 1985년 서울대와 연세대 운동권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백만학도> 편집에 관여한 혐의로 1987년 가을 체포돼 이듬해(1988년) 4월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자신의 인생 설계 및 정치적 진로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노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이 시절에 이뤄졌다. 그는 연세대 4학년 시절인 1987년 시국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도피생활을 하다 우연히 부산의 주물공장에 의탁하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이호철 씨의 소개로 부산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 관계를 맺고 동고동락해 온 이 전 지사는 1993년 안희정 충남지사 등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산실인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들어 중·장기 대권 프로젝트를 입안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 선거대책위원회 기획팀장으로 맹활약하면서 참여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의 눈물’ ‘기타 치는 대통령’ 등을 기획해 대박을 터뜨리며 미디어 선거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전 지사의 정치 행보가 순탄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참여정부 최고 실세로 통했던 만큼 그는 숱한 구설과 각종 의혹에 시달리며 검찰과 모진 악연을 이어갔다. 실제로 그는 참여정부 때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특검을 포함해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검찰 수사를 받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검찰이 내사한 것까지 합치면 모두 10차례가 넘는다.
그는 2004년 노 전 대통령 측근비리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시작으로 같은 해 썬앤문 그룹에서 불법정치자금 1억 500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벌금 3000만 원에 추징금 500만 원을 선고받은 바 있다. 2005년 12월에는 불법대선자금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검찰이 이 전 지사가 2002년 삼성 측에서 6억 원의 채권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으나 공소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처벌불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또 이 전 지사는 2005년 러시아 사할린 유전개발 의혹 사건으로 다시 검찰에 소환됐다. 이른바 ‘오일 게이트’로 불렸던 이 사건은 철도공사가 아무 연고도 없는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중도 계약해지로 자금을 떼이게 된 사건으로 ‘특검’으로까지 비화된 바 있다. 당시 이 전 지사는 사무실과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을 당했고, 검찰 소환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2008년에 터진 전군표 전 국세청장 인사청탁 로비 사건과 신성해운 1000만 원 수수 의혹, 2009년 강원랜드 비리 의혹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검찰과 특검의 수사대상에 올랐으나 매번 증거불충분으로 사법처리를 면한 바 있다.
이처럼 숱한 구설과 각종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던 이 전 지사는 참여정부 최대 게이트 사건인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맞게 된다. 그는 2009년 3월 박 전 회장과 정대근 전 농협회장으로부터 2억 2000만 원 상당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이 전 지사는 구속 직전인 2009년 3월 2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정계를 떠나겠다’는 배수진을 치면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구속 5개월 만인 2009년 8월 보석으로 풀려난 이 전 지사는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봉하마을로 내려가 “강원도에 은혜를 갚겠다”라며 우회적으로 강원도지사 출마의사를 표명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노 전 대통령 서거(2009년 5월)라는 격랑 속에서 ‘정치적 길’을 찾던 이 전 시장은 항소심이 진행되던 지난해 4월 강원도지사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이 전 지사는 보수 성향이 강한 강원지역 곳곳을 누비며 선전한 끝에 40대의 젊은 나이에 도백에 오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도지사 당선으로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는 듯했지만 ‘박연차 저주’는 계속해서 그를 억누르는 족쇄로 작용했다. 1심에 이어 2심 재판부마저 이 전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해 그는 도지사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됐다. 다행히 헌법재판소가 ‘직무정지’ 족쇄를 풀어줘 두 달 만에 업무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지막 관문인 대법원의 높은 문은 결국 넘지 못했다.
강원도 산골 소년이었던 이 전 지사는 23세 때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공교롭게도 23년이 되던 해에 ‘정치적 사형’ 선고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참여정부 탄생에 큰 공을 세운 그는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기도 했지만 ‘박연차 저주’의 덫에 걸려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40대 최연소 도지사’ 기록과 ‘취임 7개월 만에 낙마한 도지사’ 불명예를 함께 안고 ‘야인’으로 돌아간 이 전 지사가 향후 인생 항로 및 정치 지향점을 어떻게 설계할지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