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호 대표 “불법 재하도급 없었다” 거짓 드러나…심상정 의원 “총체적 관리 부실, 정몽규 회장 책임져야”
17일 경찰 등에 따르면 광주경찰청 전담수사본부는 지난 16일 서울 HDC현산 본사에 수사관 10여 명을 보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다. 철거 계약서 원본과 HDC현산 건설본부 직원, 재개발 현장 관계자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경찰은 불법 재하도급 관행으로 대형 참사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HDC현산은 참사 직후 “불법 재하도급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권순호 대표도 기자회견 등을 통해 “재하도급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2018년 학동 4구역 재개발 조합과 철거·시공 도급계약을 체결한 HDC현산은 일반건축물 철거를 한솔기업에 맡겼고, 한솔기업은 지난해 2월 백솔건설과 아산산업개발 등 10여 개의 광주지역 영세업체에 재하도급을 줬다. 또 재개발 조합은 사고 구역의 석면해체 공사를 다원그룹의 다원이앤씨에 맡겼다. 다원이앤씨는 한솔기업처럼 백솔건설에 석면해체 재하도급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HDC현산의 해명과 달리 불법 재하도급이라는 건설업계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는 HDC현산이 현장감독에도 소홀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광주경찰청 전담수사본부 관계자는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 현장의 건축물과 석면해체 공사 모두 재하도급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며 “입증할 자료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재하도급은 하도급 받은 건설공사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에 다시 하도급하는 것을 말한다. 건설산업기본법 제29조 제1항 및 제4항에 따르면 시공사가 전문업자에게 특정 공정에 대해 하도급 계약을 맺으면 해당 전문건설업자는 또 다시 다른 전문건설업자에게 하도급을 못하도록 하는 재하도급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안전사회시민연대 관계자는 “HDC현산이 시공하는 재개발 구역에서 참사가 났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기에 책임자는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건설현장에서 불법 재하도급 계약 구조가 만연해 있고 ‘하청·재하청·재재하청’으로 이익을 챙기는 대기업 행태로 수많은 사람, 노동자,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설 현장에선 재하도급 계약이 만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HDC현산과 같은 대규모 건설업체에는 기능공이 없어 협력업체와 하도급 계약을 통해 공사를 진행한다. 즉, HDC현산에 목수 또는 벽돌을 쌓아 올리는 기사 등 기능공이 없어 한솔기업과 하도급 계약을 맺고 건설 공사를 실시하는 것. 안형준 건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건설 공사 시스템 문제가 광부 붕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법 재하도급 관행이 만연한 건설 공사 시스템 문제를 고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공사비 절감을 위해 재하도급 관행이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HDC현산이 한솔기업에 하도급을 주고, 다시 백솔건설 등으로 재하도급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철거 공사비는 3.3㎡(약 1평) 당 28만 원에서 4만 원까지 줄어들었다.
서울에 본사를 둔 한솔기업이 광주로 인력과 장비를 이동하는 대신 도급액의 일부를 현지업체에 재하도급을 주면 시간·비용 절감과 함께 다른 공사에 착수해 이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철거 비용이 떨어지면 원가 절감과 공기 단축을 위한 날림 공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건설업계 고질적 병폐의 원인은 비용 절감뿐만이 아니다. 국내에는 헐값임에도 공사를 떠맡는 영세업체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한솔기업의 하도급 업체인 백솔건설도 공사 예정가의 7분의 1에 불과한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맡아 수행했다. 심지어 백솔건설은 지난해 설립된 지역 신생 회사다. 이곳은 석면해체 면허가 없어 다른 업체에 빌려 철거 공정을 진행한다. 기술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생 영세업체가 저가 수주로 철거공사를 떠안고 있던 것.
김태준 대한건설정책 연구원은 “구조적으로 국내에 철거업체가 별로 없다”며 “전문 철거업체를 한정해 정식 기사들을 고용한 뒤 공사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건설업계에서 하도급, 재하도급 단계는 줄여가도록 논의는 이어지고 있는데 전문성이 떨어지는 영세업체에 대한 지적은 나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철거 작업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형준 교수는 “건설업체에선 철거 공사를 ‘메인 공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건물을 짓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며 “철거 공사도 건설 공사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현장마다 안전관리책임자가 있는데 철거 공사를 남 일로 생각해 자리를 비우는 경우,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광주 붕괴 사고 당시에도 HDC현산 측 안전관리 직원은 없었다. HDC현산의 하도급 업체인 한솔기업에선 관계자가 한 명만 나와 있었다. HDC현산이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HDC현산 관계자는 “사고 당시 자사 직원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해체 작업이기 때문에 계속 자사 직원이 상주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안형준 교수는 “원청 현장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며 “공사 현장 책임자, 현장 관리·감독을 담당하는 감리자(공사의 시공과정에서 전문기술자의 지식, 기술, 경험 등을 활용해 발주처의 자문에 응하고 설계도서에 따라 시공되는지 여부와 시공방법을 지도하는 사람), 관할 구청 관계자가 공사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HDC현산의 관리 소홀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은 더 거세지고 있다. 특히 권순호 대표의 사고 이후 발언이 도마에 오르면서 HDC현산을 향한 질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권순호 대표는 지난 9일 사고 발생 후 자정을 넘긴 10일 0시 10시쯤 사고현장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라면서도 “지난해 10대 건설사 중 무사고는 우리 회사 혼자였다. 안전관리를 최우선으로 한다”며 사망 재해 ‘0건’을 자랑했다. 그는 또 당시 HDC현산의 하도급 업체가 어느 곳인지 몰랐다. 결국 건설업계 불법 재하도급에 이어 HDC현산의 안이한 대처까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권순호 대표는 HDC현산 건설 부문에서 30년 넘게 몸담은 ‘건설통’이다. 그는 1989년 입사해 현장소장 경험을 거쳐 CEO(최고경영자)에 오른 공채 신화의 상징으로도 알려졌다. 2018년 건설사업본부장 겸 대표이사에 선임된 권순호 대표는 HDC현산의 건설 브랜드 ‘아이파크’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붕괴 사고로 권순호 대표는 책임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몽규 HDC현산 회장도 마찬가지다. 정몽규 회장은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석유화학, 정보통신 등 사업 범위를 확대하며 HDC현산을 국내 대표 종합건설사로 키워냈다는 평을 받아왔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파크 하얏트 서울’과 용산에 있는 ‘현대 아이파크몰’ 등 디자인 경영에 신경을 써 온 것도 유명하다.
하지만 내부 관리는 소홀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 측이 입수한 ‘학동 4구역 건축물해체계획서’를 보면 광주 붕괴 사고 당시 해체작업용 굴삭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놔둔 거대한 흙더미인 성토체가 건축벽에 붙어 있다. 계획서가 알려진 이상 이 같은 내용을 사업 시공사인 HDC현산 측에서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게 심상정 의원 측 주장이다. 앞서 전문가들도 성토체가 건축벽에 붙어 작업하는 경우, 건물 벽체 측면에 가해진 성토체의 토압으로 인해 붕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심상정 의원은 “광주 붕괴 사고는 철거 과정에 대한 원청의 관리부실, 감리부실 등 총체적인 부실로 인해 발생했다”며 “계획서가 원청과 감리사에 제공되고 보고되는 만큼 학동 4구역 재개발정비사업의 시공사인 HDC현산과 정몽규 회장의 책임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광주 붕괴 사고로 책임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탓에 권순호 대표와 정몽규 회장은 형사책임을 피하지 않을까 싶지만, 적어도 이번 참사에 대한 책임에서는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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