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면 알게 되는 것, 마음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이 안 풀리고, 관계가 안 풀리고, 사랑이 안 풀릴 때 마음은 정처 없이 어지럽게 떠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을 고통이라 느낀다. 그러나 삶이 고통이라고 해도 영원히 고통스럽지는 않다. 지나놓고 보면 그때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지 웃어넘겨 본 적이 있지 않은지, 혹은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문득 기억하며 그때 그 시절의 ‘나’를 의연히 안아준 적은. 고통이 세월과 함께 실체 없음을 증명하며 그렇게 지나간 것이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안신입명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에 시달린다. 쇼펜하우어의 얘기다. 철학자 박찬국 교수가 세상을 향해 쇼펜하우어 철학수업을 시작했다. 그 책이 바로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추악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숙고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바치기로 했다.” 고통의 철학자, 의지의 철학자답다. 숙고의 결과 쇼펜하우어가 던진 말,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란다.
그 최악의 세계는 우주의 의지가 우리를 향해 던져준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만든 것인가. 원래 세계는 인간의 고통을 무시할 만큼 잔인한 것인가, 혹 인간이 실체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 교수는 그 지점에서 절묘하게 쇼펜하우어를 인용한다.
“내가 왕왕 불행했던 것은 나 자신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실제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여겼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넋두리를 했다.”
나를 불행하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착각 때문이다. 욕망과 ‘나’를 등치하는 착각,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나를 ‘나’로 여기는 욕망의 착시현상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욕망하는 존재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갈망하고 재물을 갈망하고 지위를 갈망하고 인기를 갈망하고 권력을 갈망한다.
욕망은 한이 없어 서로서로 충돌한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 욕망하는 것을 공정한 방식으로 나눠주고 얻게 만드는 것, 그것을 사회는 ‘정의’라 부른다. 당연히 욕망은 죄가 아니다. 그렇지만 맹목적 욕망은 우리의 행복을 방해한다. 박 교수는 쇼펜하우어를 이렇게 정리했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기에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행복을 확보하려고 하면, 우리는 항상 결핍감과 불만에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욕망을 최소화하고 자족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생은 욕망대로 되지 않는다. 욕망대로 세상을 바꾸려 하면 돌아오는 것은 초조함과 불안, 그로 인한 고통이다. 욕망을 돌아보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조바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욕망도 편하게 흐른다.
실제로 욕망은 구름처럼 일어났다 구름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욕망이 일어날 때는 산처럼 바위처럼 영원할 것 같다. 그래서 욕망에 끌려 다닌다, 우리는. 그렇다고 일어나는 욕망을 죄악시하거나 꺾어버리며 허무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욕망 또한 구름 같은 대자연의 식구니,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는 자리가 있다. 무엇인가를 원할 때 대상에 따라가지 않고 그 대상을 지향하는 ‘나’로 돌아와 욕망이 일어나는 자리를 살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 자리를 살펴 홀로 내 운명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욕망을 죄악시하지도 않고 욕망에 시달리지도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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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