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끝났어요’ 지난 6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열린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촉구 시위 지지 집회에서 한 소녀가 가위표가 쳐진 무바라크 대통령의 포스터를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무바라크는 부랴부랴 대국민연설을 통해 여당 지도부 총사퇴, 내각 해산, 경제 및 정치 개혁, 대선 불출마 등을 천명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기관차를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는 9월 대선을 통해 정권을 이양하고 명예롭게 퇴진하겠다며 버티던 무바라크는 하루빨리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맞선 시위대의 요구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이집트 시위대가 원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무바라크의 퇴진이었다. 무바라크가 물러나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국민들의 현정부에 대한 불만은 뿌리까지 깊게 썩은 정권의 부정부패, 높은 실업률, 극심한 빈곤, 계층 간의 소외감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바라크의 30년 독재 체제 아래에서 이집트인들은 날로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와 높은 실업률로 고통 받아왔다. 지난 몇 년간 경제는 급성장했다지만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00달러(약 220만 원)에 불과하다. 특히 인구의 30%는 여전히 문맹으로 남아있는 등 빈곤층 비율은 40%대에 달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높은 실업률이었다. 이집트 정부가 발표한 공식 실업률은 9%대지만 사실은 이를 훨씬 웃도는 20%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5~24세의 청년층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러니 아무리 대학을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단순노동이나 허드렛일뿐이었다. 세 딸의 아빠이자 가판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 알리 술레이만이라는 한 시민은 “나는 16년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집을 청소해주는 가정부가 전부였다”라며 “그나마 지금은 신문이라도 팔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루 수입은 3달러 50센트(약 4000원) 정도가 전부”라고 푸념했다.
실업률이 높으니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집트의 집값은 일반 서민들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인 수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으며, 이집트 인구의 5%만이 누릴 수 있는 5성급 호텔이나 갑부들을 위한 초호화 건물들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대다수 이집트 서민들에게 필요한 주택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인권운동가인 가다 샤반다르는 “이집트인들은 고위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이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한 달에 51달러(약 5만 6000원)밖에 못 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가지밖에 없다. 거지가 되어 구걸을 하거나 아니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며 “이번 시위를 통해 이집트인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그리고 도둑도 되기 싫다’라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집트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간 무바라크는 어떤 인물일까. 1981년 대통령에 올라 무려 3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해온 무바라크는 1987년, 1993년, 1999년 대선에 단일 후보로 나와 연속으로 당선됐다. 2005년 대선 후보를 두 명 이상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하기 전까지 이집트의 대선 후보는 줄곧 단 한 명이었기 때문에 무바라크가 매 선거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집트의 선거제도가 직선제가 아닌 ‘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였던 것도 무바라크의 부정선거를 가능케 했다. 복수 후보를 허용한 2005년 대선에서도 무바라크는 이미 자신의 손 안에 있던 ‘국민회의’ 덕분에 무난히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05~1848년까지 무려 43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던 무하마드 알리 파샤 이후 이집트의 최장기 집권자로 기록되고 있는 무바라크는 이집트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부 출신이다. 항공학 학사를 받은 후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고, 그 후 이집트로 돌아와 1967년 공군사관학교 교장이 됐다.
1972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안와르 엘-사다트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에 연달아 임명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또한 다른 아랍 국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려는 사다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다트의 오른팔이자 충복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그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마저 “무바라크에게 찍히면 끝장”이라며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75년 사다트에 의해 제15대 부통령에 임명되면서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1981년 사다트가 이슬람 과격분자인 몇몇 장교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사다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제4대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암살 사건을 빌미로 반이슬람 정책을 펴는 동시에 아랍권 국가로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친교를 맺는 등 미국과 이스라엘과는 친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줄곧 친미 노선을 유지했던 무바라크 정부는 1991년 걸프전 때에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다국적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했으며, 이 대가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연합(EU) 및 걸프 연안국들은 이집트의 채무액 140억 달러(약 15조 원)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이런 배경 덕분에 무바라크가 집권한 30년 동안 이집트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국제원유가 상승으로 인해 오일 머니가 유입되면서 건설업이 붐을 이루었고, 관광산업도 한층 활기를 띄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혜택은 정부 고위관리를 비롯한 일부의 몫일 뿐 이집트 대다수 국민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게다가 1967년 선포된 ‘긴급법안’과 같은 억압은 이집트 국민들을 공포에 떨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긴급법안’이 발동되면서 정부는 마음대로 죄 없는 개인을 체포해서 감옥에 넣을 수 있었으며, 언론 및 출판에 대한 무차별 검열이 이루어지거나 헌법의 효력이 일시 정지되기까지 했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무바라크는 모두 여섯 차례가량 암살 위협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에티오피아에서 열렸던 아프리카통일기구회의에 참석했다가 이집트의 한 이슬람 지하드에 의해 독가스 암살 기도를 당했는가 하면, 1999년 대선 때에는 이집트 북동부의 포트사이드에서 길거리 유세를 하던 중 칼을 들고 리무진으로 달려든 한 남성에 의해 팔에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이 암살 기도범은 그 자리에서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무바라크의 악명이 높아진 것은 비단 독재 정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바라크 일가와 그의 측근들이 저지른 온갖 사치와 부정부패 역시 이집트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영국 <가디언>은 몇몇 이집트 관계자 및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무바라크 일족이 지금까지 비밀리에 축적한 재산이 최고 700억 달러(약 78조 20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무바라크 일가가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또 부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현재로선 극히 일부만 드러난 상태.
무바라크가 방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군고위직과 대통령직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수억 달러의 이익을 낼 수 있는 투자 협상에 참여해서 수수료 등의 수익을 거두는 방식도 그중 하나였다. 이와 관련, <라스트 파라오:오바마 시대의 무바라크와 불확실한 이집트의 미래>의 저자인 알라딘 엘라아사르 교수는 무바라크 정부에서 고위관리를 지냈던 한 인물의 말을 인용해서 무바라크 정부의 비리를 폭로했다.
일례로 지난 30년 동안 무바라크 정부는 대다수의 공공부문 회사를 무바라크 일가와 친분이 두터운 국내기업이나 외국기업에게 원래 가격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헐값에 팔아 넘겼으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곤 했다.
이밖에도 내무부와 정보부로 하여금 정부의 공적자금을 부정 취득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는데, 가령 건설회사를 설립한 후 이 회사에 굵직한 국책사업을 몽땅 맡기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계약금은 많게는 20배까지 늘 부풀려서 지급됐으며, 이렇게 기업으로 흘러들어간 자금은 다시 무바라크와 고위관리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무바라크는 이렇게 부정 취득한 재산을 대부분 영국이나 스위스 등 해외로 빼돌렸으며, 해외 부동산이나 리조트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은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무바라크 일가는 런던, 뉴욕, LA 등에 호텔과 고급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홍해 지역의 고급 리조트도 운영하고 있다.
아랍권 신문인 <알 카바르>는 이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아랍권 지도자들처럼 무바라크 일가도 뉴욕 맨해튼과 LA 베벌리힐스 등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재산은 스위스 UBS 은행, 스코틀랜드 은행, 영국의 로이드금융그룹 등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최근 이집트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일부에서는 스위스가 튀니지 대통령의 재산을 동결한 것처럼 영국도 무바라크의 자산을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 1월 말에는 무바라크의 아내 수잔과 둘째 아들 가말이 비밀리에 대규모 수행단을 거느리고 영국으로 도주했다는 소문이 불거졌었다. 당시 가져간 여행가방만 무려 80개라는 소문과 함께 영국을 거쳐 아랍에미레이트로 도주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집트 정부는 오보라고 주장하면서 무바라크 부부가 이집트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곧 해결점을 찾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천하의 독재자라 할지라도 거세게 밀어닥치는 시위대의 물결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하루아침에 벼랑 끝 신세가 되고 만 무바라크는 결국 시위 18일 만에 하야를 발표했다. 그동안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미국마저 ‘조속한 정권 이양’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마당에 그가 주장한 9월까지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집트 국민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트위터·페이스북 민주화 열망 퍼날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그러했듯이 이집트의 시위 물결이 빠른 속도로 확산된 데에는 인터넷, 특히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이트의 역할이 컸다.
현재 이집트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인구의 20%인 2000만 명 정도며, 이 가운데 페이스북 사용자는 6%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집결 장소나 시위 장소 등의 정보를 교환했으며, 경찰 검문 피하는 방법, 최루탄 살포시 대처요령 등 시위에 필요한 자료를 공유하는 등 인터넷을 적극 활용했다.
이번 반정부 시위를 촉발했던 인물도 다름 아닌 ‘구글’의 임원이었다. ‘구글’의 중동 및 북아프리카 마케팅 담당자인 와엘 그호님(31)이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이집트 시위대들의 집결지나 다름없었던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자였다.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숨진 반부패 운동가 칼레드 사이드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우리 모두는 칼레드 사이드다’라는 이름의 이 페이스북 페이지는 정부에 의해 폐쇄되기 전까지 반정부 시위대의 연락망 겸 집결지 역할과 함께 전 세계에 이집트 사태를 알리는 창구 역할도 했다.
사정이 이러니 이집트 정부와 경찰이 인터넷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 튀니지의 혁명이 SNS를 통해 어떻게 확산됐는지 똑똑히 지켜봤던 이집트 정부는 지난 1월 25일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접속을 일절 차단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28일에는 급기야 인터넷 서비스 자체를 아예 끊어 버렸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집트 정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이용해서 시위에 참가한 청년들의 이름과 신상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그호님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됐으며,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됐다가 12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한 청년은 “카이로를 탈출한 몇몇 시위대들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찰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포스팅을 보고 시위 참가자의 얼굴과 이름을 색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체포된 이들 중 일부는 그 후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한편 인터넷에 정부를 비방하는 글을 올린 블로거들이나 야당 지도자들이 야밤에 경찰에 의해 집에서 끌려나와 길거리에서 두들겨 맞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시민들도 있다.
이집트 정부가 이처럼 인터넷을 집중 감시한 이유는 이번 시위가 인터넷을 이용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