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14년 만에 또 ‘한 경기 6개’ 불명예…서건창 2014년 201안타 1병살 ‘위대한 시즌’
병살타를 무조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병살타는 감독의 적극성을 보여준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내주고 번트로 '안전하게' 주자를 2루로 보내는 대신 더 좋은 결과를 위해 공격적인 승부수를 띄웠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불운이다. 유독 병살타와 악연이 많은 두산 베어스가 그런 팀이다. 과거부터 세밀한 스몰볼보다 힘으로 맞붙는 빅볼을 추구해왔다.
한 야구인은 "병살타가 많다는 건 그만큼 1루에 나간 주자가 많았다는 의미도 된다. 타선이 강하고 공격이 활발한 팀에서 병살타가 더 나올 수밖에 없다"며 "무엇보다 잘 맞은 타구도 병살타가 될 수 있고,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될 수 있다. 병살타는 경기를 하다 보면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두산, 병살타 6개 친 경기가 두 번
두산은 지난 20일 수원 KT 위즈전에서 무려 여섯 개의 병살타를 쳤다. KBO리그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타이기록이다. 공교롭게도 이전까지 단독으로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팀 역시 두산이다. 스스로 갖고 있던 불명예 기록과 또 한 번 어깨를 나란히 한, '웃픈'(웃기고 슬픈) 하루였다.
두산의 병살타 악몽은 2회초부터 시작됐다. 1-0으로 앞선 1사 1·2루에서 정수빈이 2루수 병살타를 쳤다. KT 2루수 강민국이 1루주자 강승호를 태그한 뒤 1루로 송구해 타자 주자 정수빈까지 잡았다. 3회초 1사 1루에서는 박건우가 3루수 쪽 땅볼을 쳤다. KT 3루수 황재균이 타구를 잡아 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를 완성했다. 1루 주자 호세 페르난데스와 박건우가 타구 하나에 함께 아웃됐다.
시작에 불과했다. 5회초 1사 1·2루에서 허경민이 유격수 병살타로 순식간에 이닝을 끝냈고, 6회초 무사 1루에서 박건우가 2루수-유격수-1루수로 연결되는 두 번째 병살타를 쳤다. 양석환의 중전 안타로 만든 7회초 무사 1루 기회는 박세혁의 2루수 병살타로 무산됐다.
KT 타선은 두산 선발 김민규의 호투에 막혀 좀처럼 점수를 뽑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다섯 번째 병살타로 또 한 번의 찬스를 날리자 결국 기회를 잡았다. 7회말 1사 2루에서 허도환의 좌전 적시타가 터져 1-1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두산에는 이길 기회가 있었다. 곧바로 이어진 8회초 공격에서 선두 타자 강승호가 좌전 안타를 치고 출루했다. 묵묵히 지켜보던 김태형 감독도 결국 다음 타자 정수빈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그러나 정수빈은 두 차례 번트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스리번트 아웃 위기를 맞았고, KT 불펜 투수 주권의 3구째 체인지업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교체 투입된 KT 2루수 박경수가 정수빈의 땅볼 타구를 잡았다. 유격수 심우준-1루수 강백호가 차례로 공을 이어 받으면서 그대로 이닝 종료. 올 시즌 앞선 61경기에서 병살타가 2개뿐이던 정수빈이 이 경기 두 번째 병살타를 기록한 순간이었다. 그대로 전의를 상실한 두산은 8회말 기세 오른 KT 타선에 3점을 빼앗겨 1-4로 졌다. 병살타 6개 중 단 한 개만 덜 쳤어도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흐름이었기에 더 아쉬운 패배다.
두산 입장에선 14년 만에 다시 맛본 굴욕이었다. 두산은 2007년 6월 24일 잠실 KIA 타이거즈전에서도 병살타 6개를 쳐 종전 기록(5개·1984년 9월 11일 해태 타이거즈 외 14회)을 뛰어넘고 역대 최다 기록을 새로 썼다. 특히 경기 후반인 5회부터 9회까지 5이닝 연속 병살타 릴레이를 펼쳤다. 두산 타자들이 뭔가에 홀린 듯 주자가 1루에 있을 때마다 땅볼을 친 날이었다.
2회말 1사 1·2루에서 이종욱이 유격수 병살타를 쳤고, 5회말 1사 1루에서 최준석이 2루수 병살타로 물러났다. 또 6회말에는 안상준이 1사 1·2루에서 투수 앞 땅볼을 쳐 1루 주자까지 함께 아웃시켰고, 7회말 무사 1루에선 이종욱이 다시 2루수 쪽 땅볼을 쳐 1루 주자 오재원까지 횡사했다.
8회말 무사 1루에서도 안상준의 3루수 병살타로 기회를 날린 두산은 결국 9회말 마지막 공격 1사 1·3루에서 고영민마저 유격수 쪽으로 땅볼을 치면서 병살타로 경기의 마침표까지 찍었다. 두산 타선이 이날 11안타를 치고도 2점만 뽑은 이유다. 당시 7연패에 빠져 있던 KIA는 두산의 자멸 덕에 11-2로 크게 이겨 기사회생했다.
#두산이 모면한 또 하나의 기록
두산은 이 두 경기 외에도 병살타와 관련된 불명예스러운 기록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록을 세워서가 아니라 모면해서 더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차라리 새 기록을 작성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 병살도 아닌 '삼중살'이 기록 탄생을 막았기 때문이다.
두산은 2015년 9월 12일 잠실 KT전에서 1-11로 완패했다. 투수들이 못 던지고, 타자들이 못 쳤을 때 나오는 스코어다. 그런데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1회부터 6회까지 매번 주자가 한 명 이상 출루했고, 매번 타구 하나로 두 명 이상의 타자가 아웃됐다. 1회말 1사 1루, 3회말 무사 1루, 4회말 1사 1·3루, 5회말 무사 1루, 6회말 무사 1루가 병살타 다섯 개로 날아갔다. 2회말 무사 1·2루에서는 심지어 번트 타구가 낮게 떠올랐다가 상대 투수에게 노바운드로 잡히면서 베이스에 있던 주자 둘까지 한꺼번에 삼중살로 횡사했다.
얼핏 들여다보면, 새로 나올 수 있는 병살타 기록이 산더미였다. 일단 6이닝 연속 병살타는 단일 경기 기준으로 최다가 될 수 있었다. 최다 연속 이닝 병살타 기록은 한화가 보유한 7이닝(1994년 5월 22일 청주 OB 베어스전 6회~5월 23일 잠실 LG 트윈스전 3회)이지만, 이 기록은 두 경기에 걸쳐 수립됐다. 단일 경기 기록으로는 앞서 언급한 두산의 5이닝 연속 병살타가 최다였다. 또 한 경기 병살타 6개가 인정됐다면, 역시 앞서 언급한 2007년 6월 24일 KIA전의 최다 기록과 4년 먼저 어깨를 나란히 할 뻔했다. 두산으로서는 8년여 만에 다시 경험한 비운의 경기였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2회의 삼중살이 '병살타'가 아닌 것으로 공식 판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병살(double play)'은 수비팀이 연결된 동작으로 공격팀 선수 2명을 아웃시킨 플레이를 모두 포함한다. 하지만 '병살타'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인플레이 타구로 인해 주자가 아웃되는 상황이어야 성립된다. 타자가 플라이볼로 아웃될 경우 기존의 주자들은 원래 있던 베이스의 점유권을 계속 갖는다. 무조건 다음 베이스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주자들의 아웃은 타자의 타구 때문이 아닌 주자의 잘못으로 판단된다. '병살'은 맞지만 '병살타'로 기록되지 않는 이유다.
결국 두산은 플라이볼로 인한 삼중살 덕분(?)에 이 경기에서 병살타 5개와 4이닝 연속 병살타만 남긴 것으로 기록됐다. 물론 이렇든 저렇든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살, 유도하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투수에게 병살타는 가장 효율적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낼 수 있는 방식이다. 투수가 똑똑한 야수들의 도움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투수 A는 "아무래도 병살타를 유도하려면 확실하게 떨어지는 구종 하나가 있는 게 좋다"며 "투수들은 땅볼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타자 기준 몸쪽 공을 많이 활용한다"고 했다. 당연히 플라이볼 유형의 투수보다 땅볼 유도 능력이 좋은 투수들이 병살타를 더 잘 이끌어 낸다.
땅볼 타구의 방향도 중요하다. 투수 B는 "1-2루 간 타구를 병살로 처리하는 것보다 3루수-유격수 간 타구가 병살이 될 확률이 더 높다. 1-2루 간 타구는 1루주자가 빠를 경우 2루수가 베이스 쪽으로 가깝게 가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공간이 더 많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많은 타자들이 주자가 1루에 있을 때 1-2루 간으로 타구를 밀어 치려고(우타자 기준) 하는 이유다. 이른바 '팀 배팅'의 기본으로 꼽히는 요소다. 그는 또 "좌타자가 타석에 있고 빠른 주자가 1루에 있으면 병살 유도 확률이 떨어진다. 그럴 때는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빠져 나가는 공을 많이 던진다"고 귀띔했다.
1점을 꼭 막아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1루가 비어 있을 때 많은 팀은 병살타를 끌어내기 위해 고의사구를 활용한다. 특히 상대팀에서 가장 강한 타자가 눈앞에 서 있다면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확실하게 자동 고의사구를 지시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벤치에서 '어렵게' 승부하라는 사인이 나온다. 볼넷이 나와도 좋으니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로 공을 던지지 말라는 의미다.
투수 A는 "상대 타자가 중심타선이고 다음 순서가 좀 덜 무서운 타자라면, 처음에는 정면승부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던지다가 볼카운트에 따라 이 타석에서 해결할지 아니면 그냥 거를지 지시가 떨어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수비하는 팀이 병살타를 이끌어내기 위해 머리를 쓴다면, 공격하는 팀은 병살타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희생번트로 주자를 2루에 보내기도 하고, 경기 후반에는 발 빠른 주자를 1루에 대신 기용하기도 한다. 야구 작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히트 앤드 런'이나 '런 앤드 히트'도 무사 1루나 1사 1루에서 병살을 막기 위한 대표적인 방어책이다.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을 반드시 쳐야 하고, 주자는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는 동시에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 평범한 땅볼 타구가 나오더라도 최소한 1루주자의 2루 포스아웃은 막겠다는 의지다.
물론 이때 안타가 나오면 금상첨화다. 2루에서 멈췄어야 할 주자가 3루까지 도달할 수 있다. 포수 C는 "단독 도루가 가능한 주자가 있을 때는 굳이 무리하게 작전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 드물지만 상대의 작전을 간파하고 피치아웃으로 잡아내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병살타 누가 많이 치고 누가 안 쳤나
사실 병살타는 야구를 잘 하는 타자들, 특히 중심타선이 많이 친다. 야구인 출신인 한 단장은 "출루율이 높은 타자 뒤에 타점 능력이 좋은 타자를 배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 타자가 출루를 많이 할수록 후속타자가 병살을 칠 확률도 조금씩 높아지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KBO리그 역대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전 한화 이글스)가 최다패 기록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야구를 잘해서 경기에 많이 나갔고, 중심 타선에 많이 배치됐기에 병살타 기회(?)도 늘어났다는 얘기다.
실제로 KBO리그 통산 병살타 순위를 보면, 1위 홍성흔(전 두산·230개)을 비롯해 김태균(전 한화·228개), 정성훈(전 KIA·216개), 김동주(전 두산·186개), 이호준(전 NC 다이노스·184개), 박용택(전 LG·177개), 이범호(전 KIA·176개) 등 내로라하는 타자들이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현역 선수 중 병살타를 가장 많이 친 타자도 국가대표 4번타자 출신인 이대호(롯데 자이언츠)다. 그는 지난해까지 병살타 201개를 쳐 통산 병살타 4위에 올라 있다.
한 시즌 최다 병살타 기록도 마찬가지다. 두산 외국인 타자 호세 페르난데스는 지난해 병살타 26개를 쳐 3년 만에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팀이 치른 144경기에 2년 연속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출전했고, 늘 중요한 타순에 배치돼 병살타가 많아졌다. 성적도 눈부셨다. 타율 0.340, 홈런 21개, 105타점을 기록해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 200안타에서 딱 한 개 모자라는 안타 199개를 때려냈다. 병살타 26개를 쳐도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반대로 역대 한 시즌 최소 병살타 기록은 1982년 OB 김우열과 1983년 MBC(LG의 전신) 청룡의 김인식이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한 시즌 내내 단 하나의 병살타도 치지 않았다. 하지만 '0'보다 위대한 '1'을 기록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키움 히어로즈 서건창이다.
서건창은 2014년 133경기 616타석에서 병살타를 단 한 개만 쳤다. 그가 안타 201개를 때려내 KBO리그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한 시즌 200안타 기록을 세운 시즌이다. 김우열(62경기 255타석)과 김인식(100경기 416타석)의 '0 병살타' 기록보다 서건창의 '1 병살타' 기록이 더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심지어 서건창이 친 유일한 병살타는 그해 정규시즌 개막전(네 번째 타석)에서 나왔다. 이후 132경기 612타석에서 병살타가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다. 여러 모로 역사적인 한 해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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