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자라나는 머릿속을 그릴 수 있을까. 20세기 초 이탈리아 작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는 이런 엉뚱한 아이디어를 회화로 실현해 서양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를 ‘형이상학적 회화’라고 부르는데 당시 새로운 예술운동의 멘토로 꼽혔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여준 말이다.
키리코는 고대 유적이 있는 유럽의 어느 도시 광장 풍경으로 머릿속 공간을 표현했다. 유년기를 보냈던 도시의 기억이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던 영상에서 착상했다고 한다. 도시 공간을 통해 생각이 자라나고 담기는 뇌의 어느 부분을 구체적 형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다.
전통 수묵화를 그려온 김유경도 키리코와 같은 생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내 주목받는 작가다. 그는 동양회화의 기본 사상을 빌어 머릿속 공간을 그려낸다. 예부터 동양회화에서 최고의 목표를 삼았던 것 중 하나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운’을 그려내는 일이었다.
자연을 움직이는 힘인데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다. 동양에서는 ‘기운’으로 산수화 속에 담았고, 서양은 낭만주의 풍경화에다 ‘에너지’로 품어냈다. 그런데 기운과 에너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짚어가는 곳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인데, 그 차이가 풍경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다른 눈이다.
동양인이 바라본 풍경 속의 기운에는 감성적 코드가 숨어 있다. 장관을 연출하는 산세나 구름, 바람, 비 혹은 눈에다 인성적 요소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생명체로 자연을 대하는 것인데, 그래서 산신령 같은 이미지도 생기게 되었다. 자연을 이렇게 표현하다 보니 2000여 년 넘게 산수화가 빛을 잃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김유경도 자신이 보아온 풍경을 그린다. 마음속에 새긴 풍경을 그리는데, 여기에 기억이라는 인성적 코드를 덧붙인다. 풍경을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됐다가 흩어지는 생각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수묵 기법인 먹으로만 그린다. 그런데 서양화 기본 재료인 연필이나 목탄 혹은 콩테로 그린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개발한 기법인 동시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아낸 표현 어법인 셈이다. 그는 아무런 밑그림 없이 맨 화선지 위에 먹의 농도를 조절하는 수많은 점으로 그리기 시작해 완성까지 이뤄낸다. 이 기법 자체가 김유경이 생각을 그려내는 방법이다.
우리는 어떤 풍경을 보고 마음속에 새긴다. 자신만의 독자적 사건이 녹아든 풍경이라면 더욱 깊게 마음속에 남을 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 잔상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김유경 회화는 생각이 증발해버리는 순간을 수많은 먹 점으로 화면에다 옮기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삶이 자신이 경험해 쌓아온 기억의 집합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