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에로 비디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하소연이다. 3년 남짓 동안 배우 활동을 하며 에로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후 가수로 데뷔해 지금은 본명인 하유선으로 더 많이 알려진 하소연. 요즘은 소식이 조금 뜸하지만 어느새 서른 살이 되었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의 비디오용 에로 영화의 역사를 ‘여배우’의 관점에서 시기를 구분한다면 첫 번째 분기점은 1995년에 온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에로 비디오’의 도도한 흐름에 파문을 던진 첫 여인의 이름은 진도희. ‘젖소 부인’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그녀는 에로 비디오계 최초의 스타이자 신드롬의 주인공이었다.
이후 대세는 글래머였고 패러디였다. 수많은 부인들이 비디오 대여점의 ‘빨간 딱지’ 코너를 장식했고 에로 비디오 산업은 비디오 렌털 시장의 급성장과 함께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그리고 1990년대 말 마르크스의 말대로 양적인 증가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인지, 에로 비디오는 유호프로덕션과 한시네마타운 스타일에서 벗어나, 신감각 브랜드의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이때 선두 주자는 이승수 사장이 이끄는 클릭엔터테인먼트(클릭)였으며 그들의 무기는 새로운 비주얼이었다.
클릭은 재킷 디자인부터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여배우들은 안티 글래머 노선을 걸었다. 클릭의 영화엔 36인치 이상의 가슴 사이즈를 자랑하는 여배우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이규영 정희빈 조영원 은빛 이천년 박혜린 등 기존 여배우들과는 차별화된 느낌의 스타들이 있었다. 하지만 에로 브랜드로서 클릭엔터테인먼트의 치명적 약점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규영 정희빈 조영원 등은 활동 기간이 너무 짧았고, 은빛 박혜린 등은 구설수에 올랐다. 이때 갓 스무 살이 된 하소연이 등장한다. 2001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친구 박혜린 때문이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외모를 지닌 박혜린은 클릭의 초기작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활동했던 배우. 2001년 6월 하소연은 친구 따라 <새 됐어> 현장에 갔다가 엉겁결에 여관 아르바이트 학생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대사는 “안녕하세요” 한 마디였다. 이후 친구가 출연했던 영화들, 특히 <굿바이>를 여러 번 본 뒤 AV 영화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두 번째 작품인 <오빠의 불기둥>에선 단숨에 주연급으로 떠올랐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앳된 외모에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반달 모양의 눈웃음을 짓는 하소연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한국 AV계의 미소녀 계보는 그녀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계약 기간인 3년(2001~2003) 동안 하소연이 출연한 작품은 약 25편. 초기엔 어린 외모를 내세운 작품들이 있었지만 곧 이미지 전환을 시도한 그녀는 <동거>(2001) 같은 작품에선 성적 갈등을 겪는 젊은 유부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소연의 등장은 신드롬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생긴 팬클럽은 1년도 안 되어 2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 수를 기록했고 2002년 2월엔 오프라인에서 공식 팬클럽 창단식이 있었다. 음성적 마니아 중심이었던 한국 비디오 에로 영화계의 팬덤은 하소연을 통해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동거>는 일본의 AV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후 그녀는 코미디 멜로 판타지 등 에로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하소연>(2001) <밤의 황제>(2001) <언톨드 스토리>(2002) <만덕이의 보물상자>(2002) <이쁜이>(2002) <깃발을 꽂으며>(2003) <하지마>(2003) <로또걸>(2003) <이태원 버스>(2003) <마지막 연인>(2003) 등의 대표작이 이어졌다.
하지만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었다. ‘에로 배우’가 아닌 ‘배우’가 되려고 노력했던 하소연은 어느 시트콤에 출연했을 때 힘든 일을 겪는다. ‘에로 배우 출신’이라는 선입견과 부딪혔고 제작사는 연기력을 문제 삼으며 개런티 지급마저 하지 않았다. 이후 하소연은 에로 영화계를 떠나 2005년에 본명인 ‘하유선’을 내세우며 가수로 데뷔한다. 첫 싱글 앨범 이름은 <Born Again 0.5>. AV 배우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소망이 담긴 제목이었다.
이후 중국 시장에 진출하고 DJ와 모델 등 다양하게 활동 분야를 넓힌 하유선은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 출신의 ‘성은’과 함께 AV에서 주류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대표적 엔터테이너로 솝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직도 그녀를 따라다니는 ‘에로 출신’이라는 수식어와 그 안에 숨겨진 의미들. 더욱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만이 이런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