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지노 왕’으로 불리는 스탠리 호(가운데)와 딸 팬시 호(왼쪽), 부인 안젤라 렁. 로이터/뉴시스 |
지난 1월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가장들의 황혼’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위와 같이 언급했다. 가족 경영이 많은 아시아 기업의 창립자들이 황혼에 접어들면서 후계구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겨줄지, 그리고 재산은 누구에게 얼마나 분배할지 등 가족 간에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설령 후계구도를 명확히 했더라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공평하게 분배를 해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만족하기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불거진 카지노왕 스탠리 호(89) 가족들의 재산 싸움은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자매라고 할지라도 막대한 유산 앞에서는 남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홍콩뿐 아니라 중국 본토나 대만, 인도, 그리고 우리나라 등 전통적으로 가족들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가족기업이라면 모두 겪을 수 있는 문제다.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2세들의 시대가 도래될 홍콩과 중국의 가족 기업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고 할지라도 세월 앞에선 장사가 없는 법. 한때 홍콩 경제를 이끌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많은 창립자들이 어느덧 80~90대에 접어들면서 하나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자녀들, 즉 2세들이다.
전통적으로 가족 경영이 우세한 홍콩에서 이렇게 부자간에 경영권이 승계되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다. 샹그릴라 호텔 그룹의 로버트 퀵 회장(87)은 지난 1993년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하고 아들인 쿠닌 퀵에게 바통터치를 했다. 또한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를 소유한 미디어 재벌 런런쇼(103)는 자신의 100세 생일에 맞춰서 둘째 부인인 모나펑(80)에게 경영권을 넘긴 후 평화롭게 은퇴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이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홍콩 갑부 순위 13위이자 총자산 31억 달러(약 3조 5000억 원)를 보유한 카지노왕 스탠리 호의 경우가 있다.
지난 2009년 뇌수술을 받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호는 현재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 홍콩 및 마카오 재계는 호 가족 가운데 누가, 그리고 얼만큼 재산을 물려받을지에 관심이 쏠려있다. 호 가족의 재산 분할이 다른 가족 기업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바로 호가 4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무러 17명의 자녀를 낳은 대가족의 가장이란 점 때문이다.
현재 호 가족의 재산 다툼은 법정까지 간 상태며, 교통사고로 사망한 첫째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부인과 이들이 낳은 각각의 배 다른 형제들 간에 치열한 신경전이 계속 되고 있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 타임스>는 “호 가족의 드라마가 아시아 기업들의 승계 작업에 시한폭탄으로 작용하고 있다”라며 “이 문제가 비단 호 가족의 문제만은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가령 청유퉁 신세계개발그룹 회장(85)은 8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두 아들인 헨리 청과 피터 청 사이에서 아직까지 명확한 후계구도를 정해놓지 않아 훗날 왕자의 난이 벌어질 여지를 남겨 놓았다.
또한 리카싱 청콩그룹 회장의 경우에도 각각 두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기긴 했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았다. 캐나다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장남인 빅터와 차남인 리처드는 현재 각각 청콩그룹 부회장과 통신회사 PCCW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빅터의 경우 스탠퍼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재목으로 한때 캐나다의 투자은행인 우드 건디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현재 캐나다 정유회사인 허스키에너지의 공동회장직을 맡고 있다.
차남인 리처드는 2009년 미국의 보험회사인 AIG의 자회사인 AIG인베스트먼트를 매입해서 화제가 됐으며, 현재 <포브스>의 홍콩 갑부 순위 중 26위에 올라 있다. 하지만 자신이 대표로 있는 PCCW 통신사의 홈페이지에 학력을 허위로 기재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스탠퍼드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스탠퍼드 졸업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력란에 버젓이 ‘스탠퍼드대 졸업’이라고 명시해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밖에도 홍콩 제2의 부동산개발회사인 선흥카이의 경우에는 1990년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찌감치 승계작업이 마무리됐지만 최근 들어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사이좋게 사업을 물려받은 궈빙샹, 궈빙쟝, 궈빙롄 삼형제는 지난 20여 년간 회사를 열심히 키워왔으며, 홍콩 내 다른 기업의 형제들과 달리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영원할 것 같던 삼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발단은 기업의 회장직을 맡던 맏형 궈빙샹의 여자 문제였다. 궈빙샹이 자신과 내연 관계로 소문난 40대 미모의 한 여성을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 경영에 끌어 들였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어머니 쾅샤오칭의 주도 하에 열린 이사회를 통해 궈 회장은 만장일치로 사임이 결정됐고, 동생인 궈빙쟝과 궈빙롄에게 각각 회장직과 최고경영자(CEO)직을 물려주고 퇴출당했다.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현재 선흥카이 기업의 실세는 궈씨 형제들이 아니라 모친인 쾅샤오칭이다. 장남을 밀어내고 최고 실세로 등극한 그녀는 현재 회사 경영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임의대로 ‘홍콩의 워런 버핏’이라고 불리는 리쇼키 핸더슨개발 회장(83)을 이사로 선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아시아권 가족 기업들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종종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차이나 데일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꼽았다. 먼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웬만해선 창업자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홍콩대학의 빅터 정은 “창업자들은 기업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까지 일일이 모두 조종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홀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어렵게 얻은 자신의 힘을 최대한 누리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신을 오랫동안 지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자연히 후계자 선정 작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자녀들 간에 반목이 심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창업자들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슬하에 자녀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법적으로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있지만 홍콩의 경우 상당수의 기업가들이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부인이나 첩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해도 문제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일지도 모른다. 선친과 달리 경영에 재능이 없는 2세들도 많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창립자가 세운 회사가 3대까지 살아남는 경우는 20%도 채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 홍콩중문대학의 조셉 팬 교수는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250개의 중국 가족 기업을 조사한 결과 승계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기업의 주가가 하락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승계 작업 완료 1년 후의 주가를 살펴보니 승계하기 전보다 평균 56%가량 하락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팬 교수는 “창립자들은 대차대조표에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자신만의 두 가지 능력으로 회사의 가치를 높여 왔다. 하나는 그들 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와의 돈독한 관계다. 이런 능력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홍콩의 재벌 2세들이 과연 부친의 명성에 버금가는 경영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부정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2세들은 부친과 달리 위기 대처 능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꼬집는다. 반면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거나 해외 경험이 많지 않았던 선친과 달리 2세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또한 젊은 시절 해외 근무 경험이 많아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해외 고위층과의 인맥이 두텁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2세 경영’이 앞으로 홍콩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아버지 사업 거저준대도 ‘시큰둥’
1980년대 정부의 개방 정책에 따라 설립되기 시작한 중국의 민간기업들은 대부분 30년 안팎의 짧은 역사를 지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급성장한 중국 경제 덕분에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 내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게 됐다.
중국의 민간기업들 역시 홍콩이나 기타 아시아 국가처럼 가족 경영 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서서히 황혼에 접어들기 시작한 창업주들이 2세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과정이 다른 나라에서처럼 결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저장성상공회의소는 “앞으로 중국의 민간 기업 가운데 80% 정도가 승계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문제들이 있는 걸까. 우선 자녀들의 관심사가 부친과 다른 경우가 의외로 많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2세들이 많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일간지 <리걸 미러>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창립자의 자녀들 중 20%가량이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저장성에 거주하는 20대 중반 주샤오핑은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뜻과 달리 레스토랑 경영을 꿈꿔왔었다. 하지만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강력한 뜻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친구 하나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자신의 의지대로 은행에 취직했다. 친구의 부모가 화가 난 건 물론이었다”고 말했다.
쉽게 경영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창업주들도 문제긴 마찬가지다. 설령 은퇴를 해도 계속해서 사업에 관여하려 하기 때문에 많은 2세들이 직함만 최고경영자일 뿐 스스로를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느끼는 경우도 많다.
부친으로부터 섬유 공장을 물려받은 저우리한(28)의 경우에는 아직도 사업과 관련된 결정권을 두고 아버지와 다투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나는 경영 스타일 자체가 다르다. 아버지는 설비에 집중 투자를 해서 더 많은 공장을 짓길 원하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업 확장보다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장 힘든 건 아버지가 은퇴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스처럼 구신다는 점”이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또한 부모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아도 능력이 부족해서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실제 많은 2세들이 그러하며, 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수성가 스타일인 부모와 달리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고난을 이겨내는 능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하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도심 한복판에서 자동차 경주를 벌였다는 둥, 혹은 음주 운전으로 체포됐다는 둥 지금까지 재벌가 자녀들과 관련된 뉴스들은 부정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중국에는 대학을 비롯해 많은 기관에서 후계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심지어 정부가 나서서 2세들을 위한 훈련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2세들은 부모보다 고등 교육을 받았고 해외경험이 많으며, 혁신적이고 개방적이기 때문에 후계자 교육만 잘 받으면 아버지를 뛰어 넘는 경영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현재 상하이교통대학에는 재벌가 2세들을 위한 특별 비즈니스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3년 반 과정인 이 프로그램은 미육군사관학교 및 캠브리지대학을 비롯해 유럽의 유수한 비즈니스스쿨과의 협력으로 진행되며, 수강료는 12만 9000위안(약 2200만 원)이다.
수강생들의 대다수는 가족 기업에서 경영 업무를 배우고 있는 25~30세의 후계자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학사 혹은 석사 소지자들이며, 절반 이상이 해외 유학파 출신들이다. 루저우 식품회사의 후계자인 누시핑(26)은 “이번 교육과정을 통해 보다 국제적인 비전을 갖게 되길 바란다. 내 가족 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포부를 밝혔다.
상하이교통대학의 왕홍신 학과장은 “적절한 훈련을 통해 가족과 사회에 책임감을 갖는 훌륭한 기업가들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와 더불어 뛰어난 경영 지식과 관리자 능력도 습득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