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원세훈 행안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특히 이번 사태가 원 원장과 ‘대통령 형님’ 이상득 의원 세력 간 권력 다툼의 일환이라는 관측이 제기돼 여권에서도 긴장하고 있는 기류가 역력하다. ‘위기’에 빠졌던 원 원장이 반격에 나설 경우 최고 실세들 간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고,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빨라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 원 원장에 대한 ‘전격 교체론’이 불거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S라인’(이 대통령의 서울시 인맥) 대부로서 이 대통령 최측근으로 불리는 원 원장을 둘러싼 여권 핵심부의 ‘파워 게임’을 따라가 봤다.
“마지막 비서실장이 될 것이 유력하다.”
지난 1월 초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가 원세훈 원장의 향후 거취에 대해 묻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다. 당시 그는 “원 원장 본인이 청와대 안에서 이 대통령을 보좌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비서실장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원 원장에 대한) 이 대통령 애정도 남다르기 때문에 가능성은 80% 이상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때 행정부시장으로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던 원 원장은 현 정권 초대 행정안전부 장관에 임명됐고 뒤이어 국정원장에 발탁되며 ‘MB 복심’으로 불려왔다.
원 원장과 함께 서울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한 전직 고위 공무원은 “(원 원장에 대해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처세에 능하다는 평이 많았다. 사실 직원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만은 아니었지만 이 시장이 워낙 총애해 자타공인 ‘2인자’였다”면서 “다른 것을 다 떠나 서울시 공무원 출신이 국정원장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고 말했다.
2009년 2월 국정원에 입성한 원 원장은 이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과 정보기관 수장으로서의 힘을 바탕으로 ‘만사형통’ 이상득 의원, ‘왕의 남자’ 이재오 특임장관 등과 함께 ‘실세 중 실세’로 꼽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대통령과 일주일에 한 번 독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정치권과 경제계 등에서 원 원장을 만나고자 하는 요청이 쇄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나 같은 초선은 원 원장이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적어도 당 중진이나 재계 거물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권 초만 하더라도 이 대통령은 여러 권력기관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들 중 경찰이 작성한 내용을 가장 신뢰했지만 원 원장 취임 이후엔 국정원 보고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또한 최근 대부분의 정보가 임태희 비서실장을 거쳐 이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국정원의 특정 보고서는 이 과정 없이 ‘직보’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 원장에 대한 이 대통령의 믿음을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지만 원 원장이 주목을 받거나 구설에 올랐던 적은 거의 없었다. 이는 ‘음지’에서 일한다는 국정원 조직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과 잘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원 원장 개인 ‘스타일’ 때문이라는 게 주변의 일치된 평이다. 여권 내에서도 원 원장과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인사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원 원장에겐 적도, 동지도 없다. 오로지 이 대통령만 있을 뿐”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 출범 이후 여권 각 계파 간에 끊임없이 벌어졌던 ‘힘겨루기’의 유탄을 맞지 않고 원 원장이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것도 이러한 독특한 ‘스탠스’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선 원 원장에 대해 “충성심이 지나치게 강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불거지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듯했던 원 원장이 여권 권력싸움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국정원 내 ‘형님 세력’과 마찰을 빚으면서부터다. 원 원장은 지난 2009년 9월 국정원 인사와 예산을 주무르던 코오롱 출신 김주성 기조실장을 목영만 행정안전부 차관보로 교체했다. 목 실장은 원 원장이 행정부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최측근 인사다. 이밖에 원 원장은 ‘형님 라인’으로 분류되는 직원들을 대거 지방으로 내려 보내거나 한직으로 이동시켰다. 이를 놓고 당시 국정원 안팎에선 원 원장이 ‘형님’ 이상득 의원 측과 가까운 인사들을 내치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국정원 한 관계자는 “당시 물러났던 직원들은 내부에서도 ‘전횡’이 문제가 됐었다. 당시 원 원장 인사에 대해 평가가 엇갈렸지만 잘했다는 쪽이 우세했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원 원장이 조직 장악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국정원 내 ‘SD계’가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는 “김성호 전 원장의 경우 특정 세력에 의해 낙마했다는 게 정설이다. 또한 김주성 전 실장은 자신의 상관인 원 원장까지 사찰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원 원장이 그들을 가만두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때 사정기관 주변에선 “원 원장이 내부 직원에 의해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대로했고, 내부 검열을 강화했다”는 소문이 돈 바 있는데 이 역시 ‘형님 라인’ 척결과정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최근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이 발생한 후 이 ‘비밀스러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자 여권 일각에서는 원 원장에 의해 밀려났던 국정원 내 몇몇 직원들을 정보 유출의 진원지로 보고 있다. 내부자 제보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극비’ 사안이 외부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 국정원 안팎에서는 이들이 ‘원 원장 교체설’을 흘리며 반격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았다. 국정원은 현재 자세한 유출 경로를 추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에선 이번 사태를 ‘SD라인’과 ‘S라인’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최근 배건기 전 청와대 감찰팀장과 최영 전 강원랜드 사장 등 대표적인 S라인 인사들이 ‘함비 비리’에 연루돼 옷을 벗었는데, 그 뒤를 이어 원 원장까지 구설에 오르자 형님 세력에 의한 ‘S라인 흔들기’가 이뤄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권 핵심부 인사들은 원 원장이 사태가 수습되면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선캠프 출신의 한 여권 고위 관료는 “원 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이상득 의원과 또 주변 인사들에 대한 고급정보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껄끄러워하는 ‘형님 라인’이 원 원장에 대한 공격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지난 2009년 국정원 인사 이후 양측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데 이번 인도네시아 특사단 침입 건으로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본다. 원 원장도 칼을 빼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청와대와 여권 일각에서 정권 실세들끼리의 진검승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칫 이 대통령에게도 ‘불똥’이 튀어 레임덕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청와대 정무라인 한 관계자 역시 “원 원장이 (자신이) 당했다고 판단하면 어떤 카드를 쓸지 모른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넘어가자는 게 청와대 입장”이라면서 “일단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뒤에 자연스럽게 국정원장을 교체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 원장이 이 대통령의 ‘신뢰의 저울’ 위에 올라서 있는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국제 망신보단 낫다’
국정원은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과 관련, 연일 새로운 내용이 불거지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호텔 침입 경로, 사후 처리 과정 등 보안 사항들이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내부를 단속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정보들이 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아 당황스러운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특히 국정원은 청와대 진화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원 원장에 대한 문책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에 대해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번 사태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여러 관측들이 나오고 있는데 군과 국정원의 알력설, 여권 파워게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원세훈 원장으로부터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특정세력이 의도적으로 사태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를 놓고 국정원 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고 있지만 내부에선 오히려 반색하는 기류도 감지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국제적 망신’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국정원으로선 ‘권력 다툼’으로 이슈가 옮겨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야권과 언론이 원 원장의 조직관리, 비전문성 등을 놓고 연일 포화를 날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인사에 불만을 품은 ‘형님 라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얘기가 불거지면 실보단 득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 국정원 직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원 원장을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이 나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는 “작전 실패에 대해선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공개되는 과정은 분명 석연치 않다. 여러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번 사태를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