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59] 전통과 정성이 만나 예술이 된 대나무상자
채상은 고대 이래로 귀한 물건을 담는 상자로 애용돼왔다. 특히 궁중과 귀족 계층에서 품위 있는 여성 가구 또는 고급 공예품으로 두루 사랑을 받았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채상이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이나 장신구, 침선류, 보석 등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또한 채상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봉물을 담아 보내거나 관원들이 궁중에서 야근할 때 입을 옷을 담아 가는 상자로도 쓰였다.
조선 역대 임금들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선농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도 채상이 사용되었다. ‘일성록’ 정조 5년 윤5월 8일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선농단에 나아가 관예(임금이 추수하는 모습을 친히 관람하는 의식)를 하는데, 갓 벤 보리를 대나무상자에 고이 담아 임금에게 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몇몇 실학자는 자신의 저서에 채상에 대한 글을 남겨 눈길을 끈다. 서유구는 농업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임원십육지’에서 “호남 사람들은 대를 종이같이 다듬어서 청색과 홍색 등 여러 가지 물을 들여 옷상자 등으로 썼다”고 기록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채상을 ‘채상’(綵箱) 즉 비단상자라 표현하며 “무늬와 촉감이 비단을 바른 듯 곱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어떻게 ‘종이같이 다듬고 비단을 바른 듯 곱게’ 엮어낼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지극히 어렵고도 섬세한 제작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채상 작업은 대나무를 절반 너비로 쪼개고 이를 다시 또 절반으로 수차례 쪼개어 너비 약 7mm의 댓가지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그 후 이 댓가지를 깎아내 좀 더 매끈하고 폭을 좁게 만드는 작업(조름빼기)을 거친다. 그다음으로, 댓가지를 대올 즉, 대나무로 만든 실이나 끈처럼 얇게 뜨는 작업(대올뜨기)을 한다. 보통은 댓가지 한쪽 끝을 입에 물고 칼로 대올을 뜨는데, 그 두께에 따라 채상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상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으로, 최대한 얇고 고르게 뜨는 것이 관건이다.
그 후 대올을 물에 담가 불려 놓았다 받침대와 칼 등을 이용해 ‘훑는’ 과정을 거친다. 한 가닥씩 대올을 훑어 종잇장처럼 더 얇게 뽑아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얇은 대올이 쉽게 끊어지기 때문에 숙련된 솜씨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다음으로 대올을 염색하는데, 치자(노란색)와 같은 천연염료를 이용해 색을 내고 명반물로 착색을 한다. 채상을 만들 때 연한 색은 바탕색으로 쓰이고, 진한 색은 문양을 내는 데 쓰인다.
갖가지 색으로 물들인 대올이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채상짜기’가 시작된다. 먼저 겉상자를 짜고 그다음에 속상자를 짜게 되는데, 상자의 바탕이 되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세 올 뜨기 방식으로 대올을 엮는다. 반면 문양이나 글자를 넣을 부분에는 그 모양에 따라 한 올 뜨기부터 다섯 올 뜨기까지 다양하게 놓게 된다.
채상짜기는 바닥을 이루는 부분을 먼저 짠 뒤 이를 토대로 상자 옆면을 접고 상자의 귀 부분을 엮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겉상자와 달리 속상자는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색깔의 비단으로 테두리를 감싸 붙여 아름답도록 꾸민다. 속상자 안쪽에는 두 겹으로 한지를 붙이는데 이는 대나무 올에 옷이나 물건이 긁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상자의 네 귀퉁이에도 비단을 붙여 귀퉁이가 쉬 닳는 걸 방지하는 한편 멋스러움을 더한다.
채상은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지닌 문양으로 인해 가치가 더욱 빛난다. 전통적인 채상의 문양은 완자(卍)·수복강녕·십자·번개·줄무늬 등 주로 길복(吉福)을 추구하는 무늬로 꾸며진다.
한때 조선 여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던 혼수품이었던 채상은 1950년대 이후 플라스틱 제품의 등장으로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판로가 별로 없으니, 죽세공의 고장인 담양에서도 채상을 만드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1975년 김동연 선생이 초대 기능보유자(당시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겨우 이어진 채상장의 전통은 1987년 2대 보유자인 서한규 선생에게로 그 맥이 이어졌고, 현재는 서 선생의 딸이기도 한 서신정 명인이 3대 보유자로서 채상장의 전수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특히 서 보유자는 전통적 채상 기법을 현대 공예에 접목시켜 보다 다양한 죽세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옛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료 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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